생거진천 사거용인

2025-07-03     충청일보

[충청논단] 백성혜 한국교원대 교수

얼마 전 진천의 농다리에 갔다. 주말이라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인공폭포도 시원한 물줄기를 뿜고 있었고, 꽃들이 만발해서 제법 운치 있었다. 시원한 숲속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종종 흔들다리 가는 길을 물어보니, 흔들다리가 꽤 인기 있는 것 같았다.

곳곳에 있는 안내판 중에 ‘생거진천 사거용인’을 소개하는 글이 있었다. 읽어보니,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은 추천석이라는 농부와 선비가 각각 진천과 용인에 살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용인의 추천석을 염라대왕에게 데리고 가야 하는데, 착각해서 진천의 추천석을 데리고 갔다. 깜짝 놀란 염라대왕이 진천 추천석을 돌려보내고, 용인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승으로 되돌아간 진천의 추천석은 가족들이 장례를 빨리 치르는 바람에 들어갈 육신이 없어 당황하다가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은 용인의 추천석 몸으로 들어가 환생하였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정신은 진천의 추천석이고, 육신은 용인의 추천석인 경우에 그는 누구와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일까? 이 문제를 두고 그 당시 사또는 추천석이 살아있는 동안 진천에 사는 것이 맞고, 죽은 후에는 원래 용인의 추천석 몸이었으니 용인에 묻히는 것이 맞는다고 판결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째는 저승사자가 아무리 생년월일과 이름이 같다고 해도 용인 사람과 진천 사람을 혼동하여 염라대왕에게 엉뚱한 사람을 데리고 갈 만큼 업무에 무능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요즘 사람들은 예전 사람들과 달리 공식적인 업무의 실수를 자주 일으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런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일어났나 보다’ 하고 넘어가는 현상을 종종 본다. 그만큼 사회가 관대해졌다고 해야 하나 혹은 업무에 대한 기대가 낮아졌다고 해야 하나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죽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저승사자도 예전부터 그런 실수를 했다고 하니, 내가 요즘 사람들의 변화라고 생각했던 실수는 요즘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둘째는 사또의 판단이 맞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사또는 용인 추천석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 진천 추천석의 입장에서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용인의 추천석 모습을 한 사람과 같이 사는 진천 가족들의 입장과 용인 가족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용인의 추천석 모습을 한 사람이 진천 집에 가자 진천의 가족들이 그를 내쫓으려 했고, 용인의 가족들은 그를 용인으로 데려가려고 애쓰다가 도저히 안 되어 사또에게 갔다고 한다. 다시 살아난 추천석의 요구와 여러 다른 가족들의 요구가 충돌할 때 인공지능이라면 어떻게 판단했을까? 내 생각에 아마도 여러 가족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것 같다. 다수의 의견이 선택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행복이 우선인가의 문제는 참 어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