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금수저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금수저, 금은 생각만 해도 설렌다.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이다. 토요일, 일요일 연이어 놀 수 있는 금요일의 금도 좋은데, 순금 덩어리야 더 말해 무엇하랴. 아이가 태어나서 100일 되는 날, 일가친척, 친지를 모시고 백일잔치를 할 때 역시 축하 선물로 금반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열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찍은 아이 첫돌 사진 한두 번 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남녀가 혼인할 때도 증표로 주고받는 품목에는 금반지가 빠지지 않았다. IMF,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온 국민이 집안에 간직해 온 금가락지, 목걸이, 팔찌 등 크고 작은 금붙이를 들고나와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지 않았던가.
그렇게 쓰인 게 금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이 등장하면서 묘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요즈음 국회에서는 청문회가 한창이다. 나라의 큰일을 맡아 할 인물을 검증하는 자리이다. 금수저를 물고 사는 사람이 종종 등장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자기 이익만을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남은 삶을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열변을 토한다. 신뢰가 가지 않는 그 얼굴을 보면 눈앞이 노랗다. 얼마를 더 챙기려고, 무엇을 더 얻겠다고 저리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가 싶다.
진정 나라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이를 증명한 이들이 있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나라를 위한 삶은 그만큼 희생이 크다는 것이리라. 나를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 우리 지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진천이 낳은 역사 인물인 동천 신팔균 장군이다.
그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대대로 나랏일을 해 온 정통 무관 집안의 피를 물려받았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다. 이월면 논실마을에 가면 그의 선대들이 살아온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중기 호성공신이며 평천부원군을 지낸 신잡 선생의 위패를 모신 노은영당이 있고, 그의 조부가 살던 신헌 고택이 있다.
신잡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형이다. 신헌은 ‘수뢰포’를 제작하고 서양식 신병기를 연구한 <훈국신조기기도설>을 저술했고, 강화도 조약 및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외교관이다.
신팔균 장군은 1882년, 아버지 신석희가 한성판윤으로 있을 당시 서울에서 태어나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을 지킨 장교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이월로 낙향하여 보명학교에서 후학을 기르며 항일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활동을 하던 중 1912년 일본군에 쫓기다가 서울의 한 병원으로 숨어들어 들게 되었고, 그를 숨겨준 이가 간호사 임수명이었다. 그렇게 둘은 운명적으로 만나 1914년 결혼을 하고 독립운동의 공동체가 된다.
그는 만주 상해 등지로 전전하며 1919년 서로군정서에 참여, 독립군 군사훈련을 담당하다 독립군 간부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1922년 흩어졌던 8개 단체와 9회(會)가 통합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1924년 7월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 밀림 속에서 무관 생도들과 독립군의 합동 훈련을 하던 중, 일제의 습격을 받아 장렬히 순직하였다. 그의 나이 마흔셋이다. 빛나는 금수저의 금값은 그렇게 쓰이는 것이 아닐까. 나라에서는 그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