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에 즈음하여

2025-08-05     충청일보

[김효겸의 세상바라보기]  김효겸 전 대원대 총장 

해방(解放)은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을 말한다. 독립(獨立)은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아니하는 상태로 됨'을 말한다.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음'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금년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80번째 광복절(National Liberation Day)이다. 매우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깊이 되새기고 길이 잊지 말아야 한다. 광복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연합군의 승리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시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3일 후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시에 '팻 맨'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포츠담(독일)선언(미·영·중)을 거부하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히로시마는 일본군 제2사령부, 통신 센터, 병참 기지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 추가적인 원자폭탄 투하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초기 2개월에서 4개월 동안 약 90,000명에서 166,000명이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섬광화상, 건물 잔해, 피폭 등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나가사키에서도 비슷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두 도시의 사망자 중 절반은 원폭 투하 당일에 사망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소련의 만주 침공과 맞물려 결국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원자폭탄 투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많은 민간인 희생을 초래한 비판도 존재한다. 역사적,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직후 일본 정부와 군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원폭 투하 이후 일본 정부 내에서 항복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을 주장하는 화평파의 입장과 동시에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 등의 조건을 내세우며 저항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입장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이러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항복 결정이 지연되었다.

일본의 항복 지연으로 인해 미국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과 만주 침공이 겹치면서 일본의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최종적으로 항복을 결정했다. 이로써 우리는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의 대가는 컸다. 1945년12월25일 모스코바 3상회의(미·영·소)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신탁통치를 하기로 합의했다.

이상을 보면서 다시는 주권을 잃는 일이 없도록 다짐해야 한다. 국방의 중요성과 안보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유비무환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