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형질

2025-08-11     충청일보

[건강칼럼] 박성규 한의학 박사

인간의 특성은 크게 환경과 형질에 의해 결정되며 건강과 수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의지와 습관으로 형성되는 섭생이 가장 중요하나 이 또한 환경과 형질의 영향을 받는다.

‘동의보감’에서는 강령인 ‘신형장부도’에서 환경론과 형질론을 천명하고 전편에 걸쳐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환경이고 이에 대한 개개의 대응 방식을 물려받은 것이 형질인데 두 요소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커지고 결과적으로 형질 또한 영향을 받고 있다.

브리튼 섬은 기원후 43년부터 약 4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 로마가 안으로부터 멸망하면서 브리튼은 바이킹의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이때 브리튼의 구조 요청으로 영국 땅을 밟은 후 그대로 눌러앉은 이들이 게르만의 앵글족과 색슨족으로 영국의 주류가 됐다. 앵글로색슨족이 거친 라인강 유역에서 살았을 때는 키도 크고 건장했다. 하지만 섬이라는 환경에 수백 년 적응하면서 독일인과는 다른 신체 및 성격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주류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한민족으로 유전적으로도 일본인과 한국인은 가장 유사하다. 하지만 섬이라는 환경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일본인은 한국인과 다른 신체 및 성격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독일인과 영국인 그리고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형질의 차이가 크다. 환경이 형질을 변화시킨 예는 무수히 많다. 금발, 푸른 눈, 하얀 피부 등으로 대표되는 북유럽인 또한 겨울이 길고 햇빛이 귀한 환경이 만들어낸 형질이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은 달밤에 성 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으로 아들을 본다. 크리스마스 섬의 홍게는 1억 마리가 동시에 산란을 위해 바닷가로 행진한다. 이러한 생리 현상은 지구와 달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름이 되면 혈기가 왕성해져 수태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동이족은 야합의 풍습이 있었는데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때까지도 보름날 밤 남녀가 모여 짝을 찾았다고 한다. 숙량흘은 72세 나이에 16세 안징재와 야합하여 공자를 얻었다. 혈기의 성쇠가 환경과 동조하였기에 가능한 풍습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생활의 법도가 무너져 혈기의 흐름이 불규칙해졌고 이로 인해 다양한 부인병에 시달리는 이가 많아졌다. 부인병을 지닌 이가 출산을 하면 부인병 인자가 유전되는 형질의 변화가 일어난다. 환경에 순응하지 않으면 형질의 이상이 발생한다.

인간은 모여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찍부터 도시 문명을 건설했다. 상하수도 등 도시 환경을 쾌적하게 구축한 경우 인구 밀도도 높고 생존율이 높은 반면, 도시 환경 구축에 실패한 경우 다양한 전염병으로 인해 오히려 시골보다 낮은 생존율을 보였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이나 19세기 유럽의 콜레라 등이 그 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획기적인 변화를 보였다. 1960년에는 52.4세였으나 1990년에는 71.4세로 늘어났고 2025년에는 83.4세가 되어 세계 평균 기대수명 73.2세를 훨씬 상회한다. 이렇게 기대수명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생활 환경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이 환경을 개선하고 형질을 변화시켰다. 반면 사회 혼란이나 경제 피폐는 환경과 형질을 악화시킨다. 건강한 삶을 위한 사회 환경을 구축하는 것은 국가와 개인이 함께 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