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넋, 무궁화

2025-08-12     충청일보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이 꽃이 무슨 꽃이냐 / 희어스름한 머리 백두산의 얼이요 /

불그스름한 고운 아침 조선의 넋이로다 //

단재 선생의 소설 <꿈하늘>에 나오는 ‘무궁화의 노래’ 일부이다. 요즈음 나라꽃, 무궁화가 만발이다. 8월 모진 폭염에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고 있다. 새로운 꽃이 끊임없이 피고 지고, 석 달 열흘 매일 핀다. 무궁하다. 우리의 민족성과도 닮은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고운 조선의 넋을 품고 간도의 대지를 누볐던 한 쌍의 젊은 부부가 있었다. 독립운동이 삶의 전부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이국의 땅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신순호와 박영준 선생이다.

신순호는 청주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어머니 오건해의 등에 업혀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간 충북의 여성운동가이다. 십 대, 어린 나이에 이미 한국광복군 진선청년공작대에서 활동하며 같은 대원인 박영준을 만나 연극, 항일 홍보 등 의기투합한다.

박영준은 1915년 독립운동가 박찬익의 셋째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몸담은 인물이다. 신순호와 같이 활동하며, 1939년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된 후, 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1942년 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서 군 행정을 담당하다가 이듬해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을 거쳐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훈련 총대장으로 활약한다.

그리고 1943년 12월 12일 임시정부 청사 대례당에서 신순호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당시 박찬익과 신건식, 오건해 부부는 이미 가족과 진배없는 동지로, 두 집안의 혼사는 자연스러운 절차였으리라. 아리따운 신부와 수려한 신랑은 김구, 조소앙 등 온 독립운동가들의 자식이었고, 축복 속에 끈끈한 동지애로 맺어졌음이 읽힌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도 그들은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주화대표단으로 남아 교포들의 귀국과 치안을 맡아 뒷바라지하고 1948년 귀국한다. 박영준은 육군사관학교 특별 2기를 졸업하고 소령으로 임관되어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차장을 비롯하여 군대에서 활동하며 1961년 소장으로 진급, 군사 지도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이후 한국전력공사 초대 사장, 서울증권 사장 등 기업가로서, 독립유공자 업적 조명 등 사회활동가로 활약하다가 2000년 3월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암울했던 시대, 단재 선생은 이렇게 읊조렸다.

‘옛날 우리 전성할 때에 / 이 꽃을 구경하니 꽃송이 크기도 하더라. / 한 잎은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고 / 또 한 잎은 만주를 지나 우수리에 늘어졌더니 // 어이해 오늘날은 / 이 꽃이 이다지 야위었느냐 /’

그랬다. 일제강점기, 백두산의 얼, 고운 아침 조선의 넋이 바싹 야위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저들이 목숨으로 지켜온 나라가 아닌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세계 속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지만, 기후 위기, 세계적인 경제 여건, 정치 등 여전히 파고가 만만치 않다. 나라보다 개인이 먼저인 이기주의 행태를 걷어내고 옛 명성을 찾을 때가 되었다. 무궁화꽃이 무궁무궁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민족의 얼이 담긴 나라꽃, 대한민국을 소담하게 가꿔 가라는 의미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