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마을 숨은 사연

2025-09-11     충청일보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백로가 지나면서 아침저녁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밤새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찬바람이 기어이 감기를 놓고 간다. 한낮은 지독히도 뜨겁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원수 대하듯 앙앙대던 여당, 야당 대표가 대통령을 가운데로 손을 맞잡아 포개더니 하룻밤 새 또 딴말이 나온다. 요상스런 세태가 어디 요즘뿐이었던가. 나라 잃은 설움에 젖어 있을 때도 그랬나 보다.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편을 다루다 보니 임시정부 시절 국무원 참사를 지낸 이화숙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의 일가를 접하게 되었다. 이화숙지사의 남편 정양필은 1894년부터 1974년까지 살다 간 청주 흥덕구 옥산면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이화숙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머무를 때다.

1942년 당시 정양필은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토로이트 지방총회 회원으로 독립자금을 대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74년 디토로이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1995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1997년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정순만의 아들이다.

검은 정순만은 1876년 태어나 1911년 사망하기까지 37세의 일기를 역사의 회오리바람 그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다. 을미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황무지 개간 반대, 1905년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하다가 고향 덕촌리로 돌아와 덕신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곧이어 망명하여 용정에 이상설의 서전서숙 설립에 참여하는 등 진천 출신 이상설과는 많은 부분을 함께 한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왕창동, 왕일초 이명을 써가며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삼만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에서 공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초기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왜 그랬을까. 전해오는 이야기가 가슴 한편을 먹먹하게 하면서 검은(儉隱)이라는 호가 머릿속을 맴돈다.

1910년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독립운동가끼리도 출신과 파벌로 대립과 파쟁이 심했던 모양이다. 1910년 1월 양성춘이 권총으로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정순만의 격정이 빚은 오발 사고로 알려졌지만, 파장은 컸다. 양성춘의 서북파와 정순만의 기호파의 파벌 싸움이 된 것이다. 이로인해 1911년 2월, 옥고를 치르고 나와 홍범도 등과 의병 공작을 논의하며 재기를 도모하던 중 6월, 그는 양성춘의 미망인과 형 덕춘에 의해 도끼로 피살된다. 보복이다.

그들은 조국 독립, 그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었음에는 분명하다. 큰일을 하려면 노선과 이념이 다룰 수 있다. 의지와 뜻이 확고한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고집이 강할 수 있다. 하나의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론의 차이가 빚은 비극은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경종을 울린다.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정치 형태를 보면 그 당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양편 모두의 애통한 죽음은 한인단체 통합인 권업회 조직으로 일단락되었다.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 그 하나만을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다소 생각과 방법이야 다를 수 있지만, 서로 양보하며, 배려하며 조화롭게 어우러지길 소망한다.

덕촌마을은 독립운동가 마을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순만과 그의 아들 정양필, 며느리 이화숙 일가의 독립정신이 살아 있는 까닭이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부터 삼일절에는 모두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한다, 독립정신을 기리며 그림자를 지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