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이를 생각하며
오래 전에 방영된 오지 여행 전문 방송에서 강원도 삼척시 도계면 어느 산골 마을 외딴집을 찾아갔다. 외딴집에 남편은 돌아가시고 혼자 살아가시는 남 할머니. 할머니 가족은 강아지 한 마리와 소 세 마리다.
강아지는 여남은 살 아이보다 강단있게 집을 지킨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 재롱 떠는 일이 일상이다. 할머니는 도회지에 나가 있는 자식보다 낫다며 강아지와 겸상을 한다.
외양간에서 한가하게 되새김질하는 누렁이 한우는 코뚜레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소는 농사일은 하지 않는단다. 역시 할머니와 함께 가족처럼 살아가는 반려동물처럼 보였다. 어미 소는 틈만 나면 할머니가 등을 긁어주길 기다리는 눈치다.
밤이면 춥다는 산골 오지에서 할머니는 날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쇠죽을 끓이신다. 소에게 조금이라도 영양이 될까 싶어 설거지 국물까지 쇠죽에 보탠다.
큰 소에 딸려 자라는 송아지 이름은 ‘잘난이’다. 이름처럼 잘 생기고 체격도 좋았다. 그 전에 송아지 이름은 ‘못난이’라고 지었단다. 날마다 못난이라고 불렀는데 성장하고 보니 참말로 못났더란다. 그래서 새 송아지는 이름은 잘난이로 지었더니 참 잘 자란다고 자랑하셨다. 할머니의 생과 끝까지 함께 할 듯이 행복하게 자라고 있었다.
직업은 속일 수 없나 보다. 송아지를 보면 긴 속눈썹에 굵은 눈망울부터 보는데, 세상에서 제일 순박하고 착하게 보인다. 잘난이도 그랬다. 잘난이 얼굴에 귀표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 품에서 지금도 잘 자라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검색해 보았다. 10년 전 12월생, 성탄절 이틀 전에 태어났고, 할머니와 7개월을 살다 봉화에 있는 최 할머니 댁으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2년 더 살다 도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겨우 2년 반을 살고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다. 남 할머니 생애 동안 보살핌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한 반전이었다.
동물의 수명은 보통 성성숙 나이의 15~20배로 보는데, 소는 15~20년 이상 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네스 기록은 미국의 젖소 '빅 버서'로 39마리 자손을 남기고 49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이었던 봉화 청량산의 노부부와 함께 살다 간 일소 누렁이 한우다. 42살 전후에 쓰러져 수명을 다하고, 그 밭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소로 농사짓는 농경문화가 없어지면서 소들의 나이는 더욱 줄어들었다. 오래 살아야 5~6세 정도에 불과하다. 도축장에서 만나는 소는 그 굵은 눈망울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도축 통로로 들어가는 소는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일 열로 대기하고 있어 뒤돌아설 수도 없다. 뒤에 있는 소를 다그치면 억지로 밀려서 들어가야 한다. 생과 사의 통로는 이런 소로 날마다 북적인다.
‘한우 먹는 날’도 있고, ‘삼겹살 데이’도 있고 ‘구구 데이’도 있다. 사람들 입장에는 먹는 즐거움이지만, 동물은 험난한 생을 살다 결국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무서운 일이다. 동물 보호의 대상은 반려동물만이 아니다. 사람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아야 하는 동물도 최소한의 동물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
고기가 귀한 시절에 유년을 보내며 자랐다. 이제는 육식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의도치 않게 매 끼니마다 고기가 섞여 있어 안 먹기도 힘들다.
나이 들면서 육식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건강상 이유도 있지만, 하나의 생명을 빼앗아야 먹을 수 있는 미안함이란 이유도 있다. 이제 잘 차려진 고기 밥상을 대하면 어느 외딴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남 할머니와 함께 살다 간 잘난이 일생이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