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편향은 감정 투쟁
[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실상과 허무를 기록한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는 그가 겪은 전장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십자사 구급차 운전사로 일했던 그는 삶과 죽음이 뒤섞인 혼돈의 현장에서 인간 이성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를 보았고, 그 경험을 훗날 문장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주의로 상기시켰다.
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1914년 6월 28일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타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태자 부부의 암살이 민족주의 열망과 제국주의 경쟁으로 맞물려 도화선이 되었고 유럽은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914년부터 4년 3개월 동안 벌어진 소모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허망한 신화로 끝이 났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고, 인류에게 깊은 상처도 남겼다.
결국 더 파괴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으며, 제국주의, 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은 역사의 분수령으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결국 더 큰 비극의 씨앗을 잉태한 채 막을 내렸으니 전쟁의 망령은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곳곳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한반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이어진 전쟁의 흔적은 한반도 곳곳에 깊은 상처처럼 남아 있다. 고구려·신라·백제의 패권 다툼, 고려의 거란·여진 ·몽골의 침략, 조선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20세기의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까지 모두 합치면 전쟁의 횟수가 수백 회다.
최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21개 회원국 정상회의는 우리 외교가 직면한 ‘미·중 패권 경쟁’의 격전장에서 한국이 가교 역할을 맡을 기회를 보여 주었다. 6년 4개월 만에 성사된 미·중 정상회담에 대해 모든 국가가 주목했으며 이 회담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를 넘어 한국이 지정학적 압박 속에서 어떤 외교적 선택지를 가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높아진 불안 속에서 동아시아의 하늘은 요즘 바람이 거세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견제 속에서 바람의 중심에 한반도가 놓여 있고 늘 그랬듯 국제정세의 변화를 계절풍처럼 이겨내야만 하는 지역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종전국이 아니라 정전국이다. 6.25 전쟁 이후 태어나 전쟁을 겪지 않은 그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형태만 다를 뿐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현실은 우리가 결코 전쟁의 위험에서 멀어져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전쟁의 망령은 언제나 균열 속에서 솟아난다. 극단적 혐중, 무조건적 친미 따위의 감정 투쟁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거나 국가 전략의 균형을 깨뜨리는 위험을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이성과 전략, 국익을 우선하는 일, 이것이 거센 바람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