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미술의 절정 '석굴암'
'석불암'에서 日에 의해 명칭 변경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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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은 8세기 중엽 동짓날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동동남 30도의 수중 문무대왕능을 향한 토함산 정상 아래에 무엇 때문에 오랜 기간 그 육중한 화강암을 다듬어 석굴암을 축조하였을까?
석굴암은 암벽을 뚫어 만든 인도나 중국의 천연석굴과는 달리 화강암을 사용하여 축조한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완성한 인공석굴이다. 석굴암은 종교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수학, 기하학, 물리학, 건축기술 등의 과학슬기가 숨어 있는 뛰어난 건축물이다.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든 후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을 배치하고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현재는 38구만이 남아있다.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넙적한 원형 주실의 천장은독특한 돔 구조로 지붕의 무게를 적절하게 안배시켜 석재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이러한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과 불상을 보면 황금비율인 √2의 수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남 30°방향으로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도 일치한다. 구조적으로는 아치형 천정을 만들 때 5단 중 3째단 부터 각 줄마다 10개의 쐐기를 방사상으로 끼워넣어 안정감을 주었다. 이 쐐기돌은 지렛대처럼 아치천장을 받쳐주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기술은 석굴이 오늘날까지 현존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이다.
또한 처음에는 습기와 베어드는 물을 자연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석굴주변을 숯으로 채우고, 환기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나 일제시대 해체 복원공사로 파괴되었다. 외부를 철근콘크리트로 덮어씌운 후 온도변화로 인해 이슬맺힘 현상이 일어나고, 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려 이끼가 끼는 등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첨단 기계장치를 이용해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여 결국 1970년대 중반 석굴암의 보존을 위해 전실 앞부분에 유리로 차단막을 설치하여 관람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신라당시 통풍으로 사용했던 감실속의 환기구멍 10개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감옥의 시멘트처럼 이중으로 철옹성을 쌓은 것이다.
이러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것으로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과학적 건축법과 원숙한 조각기법까지 신라미술의 최고절정을 이룬 최고의 걸작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