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다

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2017-12-06     충청일보

[김혜경 충북여성문인협회장·수필가] 창 넓은 커피숍 한 켠에서 햇빛을 훔치고 있다. 누구에게 주려고 이 따스하고 밝은 빛을 내려 보내는 것일까. 허락 없이 남의 집에 펼쳐진 햇살을 훔치다가 '나도 도둑이구나, 너도 도둑이구나, 도둑이 아니 사람이 없구나.' 어찌 보면 저 고운 빛으로 잎을 물들인 나무도 땅의 진기를 훔치고 빛을 훔치고 비를 훔쳐 제 몸빛을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부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훔쳐 생계를 이어가고 농부는 땅의 힘을 훔쳐 작물을 길러낸다. 그러면서 한 번도 자연의 것을 훔쳤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연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기꺼이 베풀어준 것일 뿐 결코 훔친 적은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언제쯤 자연에게 보상을 해줄 것인가. 보상해야한다는 생각은 하는 것인가. 세상에 공짜보다 좋은 것이 있던가. 나일론 바가지 하나도 공짜라면 좋은데 생명을 이어주는 것들을 공짜로 받았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공짜로 얻은 것을 소중히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덤으로 받은 것이나 서비스로 더 받아온 물건을 정말 소중히 여겼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사면 서비스로 딸려오는 것들이 많다. 화장품을 사면 갖가지 기초제품들이 딸려오고 점퍼를 사면 스카프가 딸려온다. 받을 때는 횡재한 것 같은데 어느 구석에 처박았는지 곧 기억 속에서 잊힌다.

 공짜로 얻은 것이나 훔친 것들은 절실한 바람이나 노동의 대가가 없기에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훔친 돈을 알뜰히 아껴 쓰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내가 무상으로 얻은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필요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산다. 내 것을 빼앗기거나 도둑맞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단풍 곱게 물들고 화단의 국화가 가을의 향기를 깊어지게 하는데 나는 창밖을 볼 수가 없다. 이미 월동 준비로 유리창에 덧댄 비닐이 밖의 풍경을 가린다. 내 집 앞에 세워진 건물이 내 겨울 햇살을 잘라 먹고 말았다. 봄이 되기 전까지는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겨울 햇살을 훔쳐갔다고 툴툴거려 보지만 그 것이 내 것이었다고 어떻게 증명을 할 수 있는가.

 내 집의 햇살을 도둑맞고 남의 집 햇살을 맘껏 훔치고 있는 중이다. 시집 한 권을 빼들고 시인이 정성들여 써 놓은 고귀한 몇 줄의 상상도 슬쩍 훔쳐 넣었다. 때론 남의 것을 훔치는 일도 이렇게 신이 나는 적도 있다. 젊은 날 남의 마음을 훔치는 일도 참으로 짜릿했다. 도둑들이 사전답사를 하고 계획을 세우듯이 치밀하게 짜인 우연을 만들고 그물을 치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훗날 다 알고도 기꺼이 마음을 도둑맞아주었다는 것을 알았고 나도 누군가에게 기꺼이 마음을 훔치도록 모른 척 하기도 했다.

 손끝 무뎌진 퇴물이 된 도둑처럼 이제는 누구의 마음을 훔치는 일에선 손을 털어야 한다. 단단히 마음 여미지 못한 탓인지 늦은 가을빛을 훔치러 왔는데 오히려 늦가을빛이 자꾸만 내 마음을 훔쳐낸다. 바닥을 뒹구는 갈빛이 내 눈길을 사로잡고 마음을 훔쳐간다. 오늘은 기꺼이 마음을 도둑맞아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