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청북도단재교육연수원장·아동문학가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지 않아 (후략)”/ 가수 조항조 노래, ‘고맙소’ 일부다.
듣기 거북할 수 있으나 22대 총선이 끝나자마자 국회는 노골적 갈라치기에만 목숨을 걸었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지 않아’ 노랫말 소절대로다. 아이들은 묻는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쎈(최고 권력) 사람이 누구냐고? 대통령? 아 옛날이어다. 국회의장? 뭔 소리, 대법원장? 턱도 없다. 국회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빙고다. 법사위는 법무부, 감사원, 헌법재판소, 법원 등에 대한 감시·감독 등 탄핵 소추와 법률안 심사까지 쥐고 있으니 원 구성 협상 때마다 여야가 서로 목숨 건 진짜 속셈을 알만하다.
검·판사도 피의자를 인내로 설득하고 학교 또한 교실 밖 반성벌칙이 사라진지 오래인데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군(군) 지휘·통솔자 견장을 단 장관급 장성조차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웠냐, (중략)비굴한 군인일 뿐”이라며 “10분간 퇴장…”으로 청문회를 냉동시켰다. 마구잡이로 쏜 화살은 과녁 명중과는 멀다.
◇ 끼리끼리 필살기
지난 21대 국회를 보자. 법사위원회를 오르지 못한 상임위 체류 법안이나 입법을 한답시고 쪽지 예산과 바꿔친 몽니, 하지만 ‘관례를 갖고 왜 자꾸 왈가왈부’냐며 ‘누적돼온 특권 표출’로 염장을 질러댔다. 일방적 법안처리 지연 ‘필리버스터’의 허구 등등, 그래놓고 초연한 척 의원수를 늘리려 디자인하다 끝내 불발됐다. 시스템 불량 혹은 송두리째 고장에 가까웠다. 한데 22대 국회는 아직 개원식도 못한 채 오로지 끼리끼리 필살기로 붕붕거린다. 초·재선 중진에 여야 모두 도낀 개 낀이다. 실제 숱한 적기를 놓쳐 더 늦어지면 안 될 현실 인식조차 전혀다.
피해·가해가 헷갈려 심지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낸다. 국민 쓴 소리, 반응하지 않는다. 수십 개 비례정당마저 기껏 맥 빠진 이슈를 개혁 팻말처럼 꽂고 있다. 큰 강물은 상류로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 사냥 앞둔 맹수는 발톱과 이빨을 감춘다.
◇ 안개 속에서
내전을 방불케 한 집권 여당 대표 경선,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네 밴댕이후보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외로운 일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모두 혼자다”(헤르만, ‘안개 속에서’ 일부 발췌)를 확인하듯 궤멸을 작정했다.
뭐로 보나 어디 내 놔도 밑가지 않을 맞수들의 합동토론회 중 마타도어, 우발적 일탈 아닌 3년 남짓 차기 대권 기상도에 메가톤급 자폭 아녔나. 막장드라마는 혼자일 권리를 전제한다. 고수란 자기관리다. 돌린 당심에 이제 정부 쪽 여당대표로는 어떤 허그로 어떻게 알은체 할 텐가. 거세된 희망을 기회화 하려면 미래를 향한 상호신뢰와 창조적 파괴, 즉 민심의 소재다. 잘못은 즉시 솔직히 밝히고 책임져라. 핑계로 가리다보면 거짓이 끼어들어 되레 몇 배 뒤로 물러나는 낭패를 맞는다. 보수의 정체성·자생력 회복 등 승자의 조건은 결국 또 이 노래를 안개 속에서 혼자 진정성 있게 불러야 하느냐다.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 술 취한 그날 밤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 내 손을 감싸며 괜찮아 울어준 사람 / 세상이 등져도 …”
끝으로 20여 년 지켜온 본란 칼럼집필을 내려놓는다. 오른쪽 검지 관절 부실로 ‘컴퓨터와 잠깐 결별’ 정형외과 진단에서다. 그동안 독자 제현의 호된 매에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