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넓고 넓은 대양에 떠있는 외딴 섬에서 오직 혼자 살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은 꽤나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러한 의미에서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도 발전을 이룩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 문화의 유산을 그대로 생활에 재생시키는 지혜를 활용했을 뿐이다.
우리들 범인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인(先人)이 필요하다. 배운다는 것은 흉내를 내는 모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선인들을 모방해서 이를 마스터하면 다음에는 스스로 연구해 모방의 껍질을 벗고 원래의 모습에서 탈피한 다음 자기 독자의 영역을 구축해가는 것이다. 회사에 들어간다. 상사나 선배가 일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 지식을 흡수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한 일의 결과를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기준이 파악되고 좋은가 나쁜가를 판단할 수 있다. ‘경쟁사회’라고 하면 이미지가 나쁠지 모른다. 쓸데없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러한 경쟁, 비교가 있으므로 해서 보다 진보하고 향상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 경쟁사회라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연상되는 것은 결과를 공정하게 평가하려 하지 않고 나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경쟁에 이기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경쟁하는 것처럼 경쟁하면 된다. 기록을 갱신한 선수의 공적을 충심으로 치하하고 경쟁에 진 선수의 노력에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 스포츠 경쟁이다.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공정하고 솔직하게 결과를 인정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비즈니스는 결과다. 결과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많은 눈들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평가란 있을 수 없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이 신(神)처럼 완전무결한 것을 목표로 하더라도 도저히 신처럼 될 수 없다. 그러나 옆 사람이 열심히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질 수는 없다!”는 의욕이 생긴다.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벌을 상정(想定)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현실적인 숙달(熟達)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경쟁심이 과열되면 질투, 우월감, 선망, 열등감, 적개심 등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 심리 또한 작용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최종의 목적은 자기에의 도전이며 자기와의 싸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이벌을 상정하는 것은 자기가 어제의 자기에서 오늘의 자기로 발돋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상대는 나의 스승이고 밑거름인 것이다. 내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인(先人)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원인은 그 결과를 낳는다 했다. 결과는 그 원인의 결실이다.
낮이 있기에 밤이 있고 밤이 있기에 낮이 있는 것이다. 여자 있는 곳엔 남자가 있고 남자 있는 곳엔 여자가 있기 마련이다. 눈물이 있는 곳에 웃음이 있고 웃음이 있는 곳엔 눈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라이벌은 생겨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세상 모두는 상대성 원리, 상대성 윤리로 되어있는 것이다. 내가 있어 너가 있고, 너가 있어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 라이벌이 아닌 것은 없다. 라이벌이 있어 생산, 발전, 성장, 성공이 있는 것이다. 라이벌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다. 진보는커녕 퇴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라이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