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산 중에 호랑이가 없어지면 토끼가 판을 친다. 이는 못난 것이 잘난 척 하는 꼴을 꼬집는 말이다. 배가 고픈 호랑이가 한번 으르렁거리면 그 산 속의 뭇 짐승들은 숨어 버린다. 겁 없이 까불면 호랑이 밥이 되고 말기에 짐승들이 알아서 숨는다. 그러나 이러한 꼴은 힘 앞에 굴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그렇게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해왔다. 물론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이고 언제나 때린자는 밤잠을 설치고 맞은 자는 발을 뻗고 잔다. 이러한 진실은 힘으로만 다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알게 한다. 그러나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눌러 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세상이 없어지진 않는다.
인간은 마치 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싸움질을 벌인다. 왜 인간은 싸움질을 멈추지 못하는가? 어진 마음을 멀리하고 힘만 믿는 까닭에 그렇다고 공자는 말한다. 공자가 살았던 시절에도 이미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은 없었다. 힘만 믿고 다스리던 임금들은 힘에 밀려 뒷방으로 물러나고 임금에게 힘을 제공해 주던 세도가들이 세상을 주물러 행패를 부렸다. 임금의 시대는 어진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면 백성이 편하고 민주의 시대는 어진 대통령이 세상을 다스려야 백성이 편하다. 지금 공자가 살아 있다면 어진 대통령을 찾을 것이다. 향기로운 꽃 주변에는 나비 떼가 날지만 썩은 고깃덩이에는 개미떼가 우글거린다. 어진 마음은 삶을 향기롭게 하지만 사나운 마음은 삶을 썩게 하여 역겹게 한다. 백성을 나비 떼처럼 아름답게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어느 백성이 싫어할 것인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백성을 개미떼처럼 역겹게 다스리는 마음을 어느 백성이 좋아할 것인가? 이 또한 하나도 없을 것이다.
공자께서 임금이 있는 오랑캐와 임금이 없는 중원과는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임금이 있다 손쳐도 문화가 없는 오랑캐가 임금이 없어졌지만 문화가 있는 중국이 낫다고 새길 것인가. 아니면 어진 임금이 없는 중국은 임금이 있는 오랑캐만 못하다고 새겨야 할까? 아마 이도저도 아닐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어디에든 어진 임금은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책에 보면 성군(聖君)이란 낱말이 많이들 있지만 말뿐이지 공자께서 바라던 사랑함과 올바름을 실천하는 왕도(王道)의 임금은 없었다. 모두들 저 잘났다고 떵떵거리는 세상일수록 힘센 놈이 판을 치고 나약한 백성은 신음을 해야 하였다. 공자는 이를 슬퍼했고 분노하여 세도가들의 눈 밖에 나서 조국인 노나라에서조차 쫓김을 당했던 것이다.
저 잘났다고 판을 치면서 백성을 깔보는 무리들은 권력에 빌붙은 벼슬아치에 불과하다. 그런 벼슬아치의 아첨에 놀아나 백성의 말을 듣지 못했던 임금도 망했고 그런 대통령들도 또한 망했다. 백성을 못살게 굴면 한 때는 세상을 휘두를 수는 있겠지만 오래는 가지 못한다. 권세는 십년을 못 간다는 말은 백성의 뜻에서 나온 진실이 아닌가.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임금과 세도가들 때문에 춘추시대의 공자는 고뇌를 하였고 사람의 마음을 사랑할 줄 모르고 물질의 힘만 믿고 겁 없이 판을 치는 특권층과 신흥세력들 때문에 첨단 과학시대의 백성은 고뇌한다.
어느 시대나 저 잘났다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들은 결국 백성의 몰매를 맞는 법임을 안다면 시 건방은 떨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이 있었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많은 학생과 시민들을 무참히도 도륙을 내고 정권을 장악한 무지 막중한 사악한 대통령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 백성과 나라도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저 잘난 멋으로 살아온 죗값으로 자기몸 하나 묻힐 자리도 하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역사에 백성에게 씻을 수 없는 죗값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