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설 명절을 쇠고 입춘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을 맞이한다. 한겨울에 예년보다 지나치게 따뜻해서 걱정하던 차에 매운 추위를 한차례 몰고 와, 그래 이만하면 겨울 맛이 난다고 하였다. 한데 지각한 동장군의 느닷없는 횡포로 봄맞이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사람뿐이랴. 한참 뿌리에서부터 발돋움하고 기지개 켜는 나무의 나신 위로 눈비가 섞여 내리더니 바람에 휘몰아쳐 무당 굿하듯이 파닥인다. 여기저기 농작물의 피해와 교통사고, 항공기 결항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정원 마당은 포근해 보인다. 그저 하얀 눈 세상이다.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추어 일터로 나가기 전 잠시 아파트 마당을 걷는다. 다행히 바람이 일지 않는다. 관리소에서 한차례 비질해 놓아선지 미끄럽지 않다. 가만히 보니 보도블록 위로 빗살무늬 토기처럼 빗자루로 쓸린 모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정갈함에 발자국을 내기가 아까워 멈칫거린다. 구슬땀을 흘렸을 것이 짐작되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자리를 잡으면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이곳으로 이사 올 때도 마뜩잖았다. 십여 년을 이웃한 사람들과의 이별이 우선 어려웠고 새로운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내성적인 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멀리 보고 남편을 따라나섰다. 처음엔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어색해서 눈을 피하며 수줍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자주 얼굴을 맞대고 지내자 어느새 낯익어져 강산이 변할 세월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신혼부부였던 이들은 부모가 되었고 아기들은 자라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닌다. 귀여움에 먼저 인사하는 이웃 아줌마가 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곳 호려울 사람이다.
호려울마을은 금강 연안을 지나는 우리말 지명이다. 금강물이 호리병 목처럼 좁은 마을 입구까지 들어와 흘러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호리병 목처럼 생긴 여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곳에는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온 흔적이 있다. 고라니의 서식지로 전해진다. 지금도 금강 변을 걷다 보면 귀여운 고라니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불빛에도 낯설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엔 사람인 내가 놀랐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걸으면 제 갈 길로 간다. 고라니에 친근하면서도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호려울 사람이 되어가며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느라 집을 떠났다가 들어오고 군입대와 제대를 했다. 이사 올 즈음 허리를 다친 남편이 건강을 찾았고 일터에서는 재난을 겪었지만 고비를 넘겼다. 친정어머니를 여의었고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시 남편이 건강적신호 앞에 서게 되었다. 이런 곡절들을 겪으며 당혹스럽기도 했으나 천천히 돌아보며 살아가라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연륜을 쌓았다.
다시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계절이 되었다. 가족과 이웃으로 추억을 쌓아가며 호려울마을을 걸으련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고향을 만들어 주고 지나온 날들을 켜켜이 꺼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엮어가야지 싶다. 대보름인 오늘 밤, 세상 풍파에도 요새 같은 호려울 마당에서 달 마중을 하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