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인생은 ‘나는 갈매기’ 진흙밭에 발자국 남겼을 뿐, 동 서쪽 어느 쪽으로 날아갔는지 알 길 없네!” 소동파 중
오이 한 포기가 허공에 길을 낸다. 제 밥그릇 같은 화분에 씨앗을 심고 기도하던 아이 손처럼 초록색 잎 공손하게 모으며 흙을 뚫고 나오더니, 줄기를 세우고 잎을 너풀거리더니, 사춘기 아이처럼 덩굴을 만들어 세상을 더듬는다.
정원의 노간주나무도 노란 꽃 가득 달고 허공에 길을 낸다. 그 꽃을 품고 황홀해진 하늘은 가슴이 붉었다. 그 하늘을 하얀 비행기가 하얀 길을 만들며 간다. 그러나 허공에 만든 길은 오이 줄기가 마르면, 노간주나무가 쓰러지면, 비행기가 사라지면 흔적도 없다.
나도 길을 만들며 간다. 은빛 날카로운 칼로 천지를 가르는 번개처럼, 알프스 만년설을 무너뜨리는 천둥처럼 내 길에 큰 이름을 남기고 싶지만, 칼이 짧다는 핑계로 호흡이 얕다는 핑계로 조용히 등을 구부리고 간다.
더듬은 거리도 짧다. 천안과 그 언저리, 강원도와 거제도, 기껏 스위스의 몽블랑, 기껏 스페인의 마드리드, 기껏 호주의 불루 마운틴과 골드 코스트다. 길을 만든다고 불도저처럼 돌진하고 100미터 달리기하듯 뛰던 몸은 이제 등이 새우처럼 휘고 머리엔 한라산 상고대의 눈을 얹은듯하다.
그러니 이름을 남기려 하기보다 갈지자로 가고 싶다. 새 길을 더듬다가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상처도 입을 테지만, 친구 따라가다가 길을 잃기도 하겠지만 그런들 어떤가. 넘어질수록 다시 일어서는 기쁨도 있고, 상처가 나았다는 기쁨도 있고, 그럴수록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더 들 테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여러 길을 더듬고 싶다.
땅속의 길은 어떨까. 마음에 낸 길은 어떨까도 더듬고 싶다. 300명은 너끈하게 쉴 느티나무는 그 품만큼 땅속에 너른 길을 낸다. 예비군복 같은 둥치의 모과나무와 분홍 꽃잎을 살그머니 열고 있는 그 옆의 살구나무도 땅속에 길을 내다가 다투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모과나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살구나무의 가느다란 가지가 모과나무의 거친 소리에 주눅이 들어 꺾였다.
나도 가끔 못 들을 소리를 들으면 살구나무처럼 상처를 입는다. 봄 언덕에서 노란 양지꽃을 처음 봤을 때처럼 반갑던 그대도 관계가 불편해지면 헤어지고 싶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도 함께 한 시간을 지울 때는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머뭇거리는 떨림이 있다. 더구나 깊은 골을 새기며 만든 인연이 갈 때는 우울로, 슬픔으로, 애석함으로 남아 팔에 새긴 먹물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큼 아프다.
‘사람에 있어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할 일은 항상 자기 앞의 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나 다닐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대인의 마음 씀씀이거늘, 만약 면전의 길을 험난하게 막아 놓고 누구도 다니지 못하게 한다면 다른 사람만 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도 발 딛을 땅이 없다.’라는 송나라 혜남 스님의 말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더 상처 입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가끔 길을 닫고 싶다.
그러나 길 위에서 나는 소리가 대비로 등짝을 후려치듯 본연을 깨운다. 아침을 깨우는 청소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 신발 바닥의 고무가 도로에 쩍 붙을 여름 한낮에 도로를 포장하는 이들이 길에 줄을 긋느라 치는 고함, 사람과 차를 용케 피하며 배달하는 오토바이의 요란한 소리를 들으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슨 생각으로 길을 걷는가.’란 물음이 온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주는 새로운 소식을 듣는다. 인생은 음악의 ‘도’ 음과 같아서, 모든 음악이 낮은음 도와 높은음 도 사이에 있는 것처럼, 행복과 고통과 희열과 좌절과 갈등이 길에 있고 또 길에서 풀 수 있다는. 그러니 이것들을 싣고 가는 길의 소리를 품으란다. 지나고 보면 다 고요해진단다.
‘허공이란 원래 청정한 것이어서 번개와 뇌성이 하늘을 찢어 놓을 듯해도 찢겨나갈 것도 갈라질 것도 없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먹장구름을 마다하지 않는다.’ 는 소동파의 말처럼, 허공에 또 마음에 낸 길들은 찢겨나갈 것도 갈라질 것도 없는 그대로라니 이젠 먹장구름이든 애련의 마음이든 칼로 가슴을 후비는 아픔이든 다 와도 좋다. 품고 가리라. 품었다가 내가 가는 날 제자리에 놓으리라. 원래 없었던 것처럼, 있던 자국도 꿰맨 자국도 없는 하늘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