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또 눈이 내린다. 나뭇가지마다 몽글몽글 목화송이가 만발이다. 그해 대련의 그 겨울에도 그랬을까? 1936년 2월 18일 뤼순 감옥,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한 조선 사내가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조선옷에 솜을 많이 놓아 두툼하게 하여 보내 달라” 그것이 고국의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말이었다. 싸늘히 식어가는 생을 부여잡고 할딱이는 의식은 하얀 목화송이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목화는 어머니의 사랑, 조국의 품이었으리라. 그가 평생 꿈꿔온 세상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내 나라를 온전히 찾는 것이었다.

3일간을 무의식 속을 헤매다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단재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갔다.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열여섯 살 아들과 함께 달려간 여인은 독립운동의 동지이자 아내인 박자혜다. 무명 솜옷 한 벌 못 내밀고 남의 나라에서 남편의 주검을 마주한 그녀, 울음조차 낼 수 없었다. 일본의 발아래 밟힐 수 없으니 화장하여 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남편의 유해를 화장하여 차마 날리지 못하고 유골을 가슴에 품고 돌아와 단재가 자란 유년의 뜰에 묻었다.

가족의 삶은 더욱 피폐했다. ‘박자혜 산파’란 간판을 내걸고 있었으나 서슬 퍼런 일제 감시 앞에서 독립운동가의 집을 당당히 드나들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살림이었음은 불문가지다. 오죽하면 아내에게 두 아들과 먹고 살기 힘들면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고 새 삶을 찾으라 했을까.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한 어느 방향으로도 허리를 굽힐 수 없다하여 세수할 때조차 고개와 허리를 꼿꼿이 세워 온통 앞자락이 물에 젖었다는 일화는 일제에 대한 선생의 자존감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일편단생一片丹生 신채호, 그는 188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가 계신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여 조부 슬하에서 성장했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라 1905년 성균관 박사에 올랐으나, 을사늑약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뛰어든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 등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역사학자로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처칠의 말처럼 단재 역시 ‘영토를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재생은 없다’라며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역사 연구가 곧 독립운동이라 했다. 역사만이 희망이라 했다. 역사는 그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만주 일대를 발로 뛰며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역사서를 저술했다.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등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리려 했다. 한편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도령전’ ‘꿈하늘’ 등 많은 영웅소설을 썼다. 힘없이 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 앞에 강력한 영웅을 출현시켜 일본으로부터,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에서 가정은 늘 뒷전이었다. 오로지 우리의 역사, 잃어버린 나라를 찾고자 하는 일념이 있었을 뿐이다. ‘꿈하늘’에서 읊은 무궁화 시 한 구절이 맴돈다.

‘옛날 우리 전성한 때에 / 이 꽃을 구경하니 꽃송이 크기도 하더라 / 한 잎은 황해 발해를 건너 대륙을 덮고 / 또 한 잎은 만주를 지나 우수리에 늘어졌더니 / 어이해 오늘날은 / 이 꽃이 이다지 야위었느냐’

목화솜 넣은 조선옷 한 벌 끝내 못 입고 목숨으로 지켜온 나라, 세계 선진 대열에 접어든 대한민국이 오늘날 어이해 이 꼴이 되었는가. 가지마다 피어오른 하얀 목화송이가 방울방울 눈물로 흐른다. 눈물은 이내 약물 되어 야윈 몸을 다시 꼿꼿이 세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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