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천안 청수 공원 속 숲에 들어서면 기다리는 연인이라도 있는 양 설렌다. 잎들이 반짝반짝 윤을 내는 5월 초의 숲은 더욱 그렇다. 숲이 주는 싱그런 냄새에 짧은 오솔길도 오래 걷고 싶다. 그런 숲이 내 집 앞에 있다.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소나무다. 솔향에 코를 벌룽거리다 옆을 보니 길옆 신갈나무 너른 잎에 송홧가루가 노랗게 앉았다. 호젓한 길, 운치 있게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시를 읊어본다. 송홧가루를 모아 다식을 만들어 먹으면 영양 만점이다. 예전 큰 엄마 댁에선 잔치나 제사 때에 송화다식을 빚었다. 송홧가루를 꿀에 반죽해서 다식판에 눌러 만든다. 금방 만든 송화다식을 입에 넣으면 달곰한 것이 혀에 닿았다가 눈 녹듯 사라진다. 큰집도, 큰엄마도 다 사라진 지금 그 다식을 언제 또 먹어볼까.

몇 걸음 앞에 청미래덩굴 여린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지역에 따라 멍가, 망개, 맹감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50년 전 골목에서 “맹감 떠어억” 하는 소리가 나면 얼른 나가서 몇 개씩 사 오곤 했다. 찰지고 보드라운 떡 속에 달디단 팥소가 들어 있다. 요즘은 팥소에 딸기나 키위 등 과일을 곁들여 더 화려한 떡으로 변신했다. 잎은 말려서 차로 마시고 빨간 열매를 단 줄기의 선이 예뻐서 꽃꽂이 재료로 많이 쓴다.

은사시나무 씨가 떨어진 숲은 압권이다. 겨울왕국에 온 것처럼 숲길이 온통 하얗다. 은사시나무를 보면 은갈치가 생각난다. 수백 그루의 은사시나무 숲을 멀리서 보면 은갈치 수백 마리가 서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바람이라도 불면 파란 하늘에 잎이 반짝거리는 것이 꼭 바다에 은갈치가 떼를 이룬 듯 장관이다. 은사시나무의 뒷면이 은색이고 잎자루가 기니 보이는 현상이다. 쌓인 씨는 솜처럼 푹신하다. 돗자리 펴고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바람을 맞는다. 누워있으면 바람이 살랑살랑, 살갗의 솜털을 간질이며 지나간다. 하늘은 또 왜 이리 맑은지. 생각조차 잊고 내 본질을 찾아 기분 좋게 침잠한다.

한참을 그리 보내고는 다시 걷는 숲길에서 애기똥풀을 본다. 꽃대나 줄기를 자르면 끝에 노란 물이 맺혀서 ‘애기똥풀’이란 이름을 얻었다. 노란색 애기똥풀꽃을 숲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이유는 ‘씨앗’에 있다. 비밀 같은 이야기, 바람이 귓가에 살짝 전해주고 가는 이야기다.

가느다란 꼬투리에 든 씨앗을 개미가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씨앗을 감싼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것을 개미가 좋아한다. 씨앗을 먹고 개미가 이동하면 발에 붙었던 씨앗이 떨어진 곳에서 또 자라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독초로 알려져 있으니, 입에 대는 것은 금물이다.

찔레꽃도 눈에 띈다. 굵은 찔레 순을 보고 그냥 갈 수 없다. 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먹는다. 단맛이 난다. 간식거리가 궁한 어린 시절 참 많이도 먹었다. 흠 흠, 갑자기 달콤한 향기가 짙게 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코를 깊이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시나무에 꽃이 만발했다. 한동안 서성인다. 항상 좋은 사람 곁은 오래 머물고 싶은 법이다. 아까시나무꽃 향에 취해 가고 싶어도 비틀거려 갈 수가 없다.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사이, 주변의 잡목을 향해 줄기를 벋고 있는 사위질빵 덩굴이 보인다. 이름이 재미있다. ‘사위질빵’. 옛날에 가을걷이 때가 되면 사위가 처가에 일을 거들러 가는 풍습이 있었다. 사위를 아끼는 장모는 사위질빵 줄기를 잘라서 사위의 지게 끈을 만들었다. 사위질빵 줄기가 약하니 무거운 것을 질 수가 없도록 한 장모의 사랑이다. 며느리 밑씻개, 며느리 배꼽, 며느리밥풀, 며느리주머니 등 ‘며느리’가 들어간 것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사위’라는 말이 들어간 유일한 식물이다.

숲길을 걸으며 항상 숲이 주는 선물을 거저 받는다. 자연은 이렇듯 한량없이 베푸는데, 우리는 개발을 명목으로 숲을 황폐화하고 있다. 개발은 오로지 인간을 위한 것, 숲을 위한 배려는 일절 없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

이제라도 숲과 함께 살자.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먼 역사로부터 이어온 이야기들, 우리의 얕은 지식으로 감히 재단할 수 없는, 끝이 없는 이야기. 숲과 좋은 인연을 맺고 싶어서 나는 자주 숲으로 간다. 망가뜨리는 사람만 있지는 않다고, 자연을 예찬하는 나 같은 사람도 많다고, 그런 나를 숲이 반겨주는 듯하다. 즐거운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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