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
비가 내리고 난 후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하늘이 정말 깨끗하고 황홀하다. 한강을 가로질러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남산 산자락을 둘러싼 나무와 꽃들이 고혹적인 풍경화를 그려낸다. 모처럼 한가로이 걸어가는 주택가 골목길 담장 위로 활짝 핀 오월의 붉은 장미가 고개 들어 반갑게 인사한다. 벚꽃이 떨어진지 오래지만 아직도 봄의 기운은 한창이다. 푸른 초목과 형형색색 꽃들이 가져다준 설렘이 가슴을 포근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어느덧 봄인가 싶었는데 봄은 점점 멀어지고 여름이 가까이 다가섰다. 요즘 세상의 모습이 난장 같아서 불편하지만 제때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새롭게 맞이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 전까지 주변 길가를 하얀 꽃으로 아름답게 수놓았던 이팝나무가 갑자기 초록빛 잎사귀로 풍성하게 치장되었다. 산책길을 따라 길게 펼쳐진 숲을 걸어가며 사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봄날이 가져다준 큰 축복이다. 짧은 만남이라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가는 봄을 고스란히 담아두기는 쉽지 않지만 남겨진 추억은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초록빛 물결처럼 살랑살랑 춤추듯 다가왔던 한낮의 수고로움에 진정 감사하다. 마냥 봄비도 반갑고 바람도 달콤하고 햇살도 포근한 봄이라서 좋다. 봄날처럼 순수를 향한 열정을 언제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요즘 때아닌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돌보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 기본이다. 단순히 권력을 잡는 일이 아니라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고 응답하는 사람을 향하는 일이다. 과연 오늘날 정치는 사람을 향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권은 정권을 잡는 일에만 몰두하여 조급증에 빠져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대결을 부추기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너진 신뢰와 반복되는 거짓은 사회를 비극으로 내몬다. 정치인이 진정성을 잃어버리면 국민들은 신뢰하지 못하고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사회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고 국민들은 희망이 없어지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 문제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닌 두려움 그 자체다.”라는 말로 국민들을 위로했다. 대공황의 절망 속에서 이 말은 미국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우리의 현실은 청년은 희망이 없는 절망으로, 중년은 가족 생계 문제로, 노년은 사회적 고립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또한, 자살률은 세계 1위 및 출산율은 세계 최저 등 사실상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혼돈 상태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심으로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지 않으면 어떤 정치도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는 쉽지 않다. 국민들이 두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진정성 있는 노력이 바람직하다.
계절의 여왕 오월도 이제 저물어간다. 몇 년 전 하늘로 떠나가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어머니는 유난히 붉은 장미와 작약을 좋아하셨다. 생전에 자주 손을 꼭 잡아드리고 힘껏 안아드리지 못한 뒤늦은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온다.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온 힘은 자식 사랑마저도 수줍어했던 어머니의 신앙과 책임이 아닐까 싶다. 가족도 서로의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어쩌면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이해하고 깨우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말없이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가르침을 알려주고자 하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는 조급한 야망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맥베스의 비극은 조급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마녀들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조바심으로 왕좌를 탐하다가 왕을 살해한 뒤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부인은 야망은 있으나 악랄함이 부족하다면서 조급증을 부추긴다. 왕의 자리에 오른 맥베스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더 큰 죄악을 저지르고 결국 환각증상에 시달리며 자멸한다. 남보다 빨리 출세하려고, 많은 성과를 내려고, 큰돈을 벌려고 허겁지겁 달리다가 앞에 놓인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결국 넘어지게 된다. 조급증에 휘둘리면 스스로 덫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가 흔적만을 남겨두고 떠나간다. 한 이틀 반짝 꽃이 피었다가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간다. 먼저 핀 꽃들이 자리를 비켜줘야 늦게 오는 꽃들이 자리를 찾아 꽃을 피운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은 스스로 자리를 비켜준다. 계절이 흘러가듯이 언젠가는 사람도 스쳐가듯이 떠나간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떠나가는 봄이 남겨준 기억은 삶의 소중한 지혜를 가르쳐준다. 우주의 섭리에 따라 오고가는 봄날의 추억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진달래는 해가 잘 드는 곳에서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고, 철쭉은 그늘진 곳에서 꽃과 잎을 함께 밀어 올린다. 일찍 피는 꽃은 잎이 얇고 부드러우며, 늦게 피는 꽃은 잎이 두껍고 강하며 향기가 오래간다. 봄꽃이 지고 난 후 꽃이 피는 배롱나무는 주변을 오래 환하게 해준다. 진달래보다 철쭉이 그리고 배롱나무가 오래 꽃을 피운다. 늦게 핀 꽃이 강하고 오래간다. 나무는 천천히 꽃을 피울수록 생명력이 강하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이 힘들지라도 조급하게 서두르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승리의 가장 강한 무기는 시간과 인내라는 말이 있다. 조급한 멸망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현명한 전략이 승리를 가져온다.
봄바람이 들판을 어루만질 때마다 생명이 용솟음치는 소리가 들린다.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어올 때 진달래가 피어나고 남실남실 잔바람이 피부에 느껴질 때 철쭉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초록빛 나무에 봄비가 스며들면 덩실덩실 나뭇가지가 춤추듯 흔들린다. 혼탁한 세상에서 얼룩진 흔적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몸부림이다.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보니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어서 나름 좋다. 붉은 장미와 작약 꽃을 수줍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잔잔한 미소가 가슴에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오월의 봄날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