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참하다. 인사하는 자태도 여간 공손하지 않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게 굽힌다. 천천히 하는 인사에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음을 느낀다. 그녀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녀의 옷이 바뀌었다. 산타의 옷이다. 빨간 부츠에 하얀 방울이 달린 빨간 고깔모자를 썼다. 그녀는 목에도 빨간 리본을 맸다.

몸매도 날렵하다. 무슨 옷을 입든지 잘 어울리는 이유다. 여름에는 망사 탱크 탑을 입어 시원한 그녀의 어깨를 감상할 수 있다.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어 늘씬한 그녀의 다리 감상하는 것도 좋다. 그녀의 예쁜 다리를 못 보는 때가 두 번 있다. 추석과 설 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모란꽃을 화려하게 수놓은 아얌도 머리에 쓴다.

그녀를 자세히 알고 싶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길가 주유소 집이다. 2년 동안 봐 왔으나 쉽게 결정한 일도 아니다. 용기를 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그 주유소의 단골손님 아닌가. 동네로 이사 온 이래 그 집만 들렀다.

주유소에 딸린 사무실은 아늑했다. 둥근 얼굴에 미소가 편안한 안주인이 맞았다. 난로 위 주전자에선 김이 모락모락 났다. 정겨운 옛 정취에 취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한 아름은 됨직한 함지박에 다복 담긴 다육이도, 작지만 굵은 기둥을 가진 해피트리도 책상 위에 앉아 나를 궁금한 듯 바라봤다. 옷걸이에 그녀의 옷도 걸려 있었다. 무작정 차를 한 잔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궁금하다 말을 했다.

그녀와 산지 벌써 10여 년이 다 되어간다며 안주인은 입을 뗐다. 주유소를 차리고 손님에게 다정한 인사를 하고 싶었던 부부는 마음을 대신할 마스코트를 찾았단다. 8개 주유소 사장들이 비슷한 시기에 마스코트 세웠으나 지금은 자기 집에서만 하고 있다 했다.

머리를 빗기고 가지런히 땋아 주는 것은 안 주인 차지란다. 계절과 분위기에 따라 아름답게 입는 그녀의 옷은 주로 남편이 인터넷에서 주문한다고 했다. 아침이면 내오고, 저녁이면 집 안으로 들이는 것도 남편 몫이다. 눈비가 오거나 폭풍우가 올 땐 절대로 바깥에 두지 않는다고 했다. 예쁜 그녀를 혼자 두었다가 검은 손이 안아 가거나 비바람에 상할까 매일 정성을 들인단다.

그녀를 돌보는 그들의 정성을 생각하다 문득 그리스 신화 속의 남자가 생각났다.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이다. 당시 그곳 여자들은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나그네들에게 몸을 팔았다. 나그네들을 박대한 결과였다. 아내로 맞이할 순결한 여자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상아로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들었다.

그리고 ‘갈라테이아’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매일 씻기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혔다.그녀와 사랑에 빠진 그는 아프로디테 축제날 제물을 바치고 아프로디테에게 진심으로 빌었다. ‘갈라테이아’를 진짜 여인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이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은 아프로디테를 감동하게 했다. 집에 돌아온 그의 뜨거운 손길이 그녀에게 닿자 차가운 상아는 따뜻한 여인의 몸으로 변했다. 그 후 둘은 결혼하여 ‘파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우리의 속담이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나보다. 주유소의 아가씨를 사랑하는 이들도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누구는 추우니 속옷을 입혀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외투를 입혀야 한다고 했단다. 가끔은 댄스복도 입히고 축제에 가는 양 드레스를 입히자고도 했다. 안주인의 대답은 시원했다.

“그럼 속옷 벗어 입히슈,” 라거나 “입은 외투 벗어서 입히슈.”라고 대거리 했다.

그녀의 이름이 궁금하다. 그녀에게 이름이 없다면 이제라도 이름을 지어줄 일이다. 속삭이듯 이름을 불러주다 보면 또 다른 사랑이 생길지 누가 아는가. 그녀의 집을 나와 이름을 생각하는 사이 내 집을 지나쳤다. 그녀가 문제다. 사랑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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