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박재명 수필가

둘째 외손녀가 태어난 지 벌써 6개월이 되었다. 목도 못 가누던 아이가 몸을 뒤척이고, 뒤집고, 기더니 지금은 혼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자랐다. 미소를 짓고 까르르 웃는다. 손을 내밀면 다가오고, 성에 차지 않으면 울기도 하며 제 가족과 정서적 유대 관계가 깊어 간다.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 않아도 옹알이 소리 내며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른의 행동과 손동작을 관찰하고 따라 하는 듯 흉내 낸다.

6개월 인생에 아직 웃는 것과 우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지만, 낯익은 얼굴을 보면 웃음으로 기억한다. 사회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자기표현과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세상을 탐색하려는 본능적 행동이 눈에 보인다. 성인에 비해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본능적으로 또는 가족의 보살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만큼 큰 손녀의 나이는 0살이다.

숫자 0에 대한 선입견에 따르면 뭔가 아이의 나이는 합당하지 않고,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할 일임에도 1년이 지나야 1살이 된다. 수학적 의미로 따진다면 이 아이의 존재는 없다는 말인가?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은 푸대접이고 가당치 않은 의미에 불과한 0살인가? 심히 불편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의 기본이 되는 숫자 0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아마 서양 나이 계산법을 도입하여 따라간 것 같다. 생명이 잉태하여 세상에 나오기까지 기간은 인정하지 않은 결과다. 사람들은 한 살이 줄었다고 대체로 좋아한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오천 년 우리 역사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순간 1살로 인정해 주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생명체로 의미를 부여해 준 것이 우리 선조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으로 아이를 잉태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지극 정성으로 보호를 받는 기간이 거의 1년이다.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이 기다린 기간도 1년, 이 모든 시간적 가치를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게 1살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 주었다. 태중의 아이 자체가 보호받아야 할 인격체이고 어머니의 숭고한 모성애를 함께 존중해 준 것이 우리 조상들의 지혜였다.

나이라는 것은 숫자나 연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철학적으로는 무(無)의 상징,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또한,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역설적 의미도 있으나 후자의 경우 출생한 아이를 두고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생활문화나 의식의 차이가 많이 나는 서양의 나이 계산법보다 훨씬 사람 중심적이며 인륜적인 동양적 사상이 본바탕이 된 것이다.

아이가 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산모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경력단절에 대한 여러 가지 대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거기에다 태어난 아이까지 0살이라는 대우는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는가? 1살을 줄인다고 생물학적으로는 더 젊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은 왜 0살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섭섭한 물음표는 아이를 볼 때마다 따라다닌다.

법이 그렇게 바뀌었으니 따를 수밖에 없지만 아이를 대할 때는 0살로 보지 말아야겠다. 우리 모두가 고대하며 기다리다 태어난 아이들은 숭고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비록 0살이라 하지만 태어나기 전 1년 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이에 맞는 대우와 보호와 의미는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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