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비 개인 하늘은 산뜻하다. 바람마저 뽀송해 초여름 맛을 더해준다. 이런 계절을 닮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주문할 종류와 물량이 많아 문자로 남길 터이니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묻는다. 의례 해 오던 일이라 스스럼없이 번호를 알려 주었다.
젊은이답게 빠른 속도로 주문이 들어왔다.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쌀 10kg 10포대, 물 2L 6묶음 10박스, 햇반 낱개 총 120개, 냉동 삼겹살 10 Kg 정도 (저희가 도착한 후 썰어도 됩니다. ) 맥심 커피믹스 낱개로 300개 이상, 이틀 후에 방문한다며 미리 준비해둘 것을 당부한다. 훈련 중이라 연락이 어려울 수 있으니 문의 사항은 문자로 남기란다. 불경기에 이런 주문이 들어오자 숨통이 트인다. 우선 재고를 확인해보니 특별히 발주를 넣을 필요는 없다.
당일, 문자가 도착하였다. 훈련 중에 군용 식량이 부족하여 대신 준비해줄 수 있느냐며 자신들은 종종 민간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 쪽에서도 준비할 시간이 되지 않아 직접 인터넷에 주문하라는 답글을 보냈고 그쪽에서는 자신은 훈련 중이라 불가피하여 부탁한다고 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속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반듯한 목소리의 청년을 의심한다는 것이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여간 객쩍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소상인들에게 유명인을 앞세워 주문하고 당일에 나타나지 않는 노쇼 (no-show)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식당, 청과물 상회, 펜션 등 가리지 않고 타겟으로 잡는다. 예약이 들어오면 상대가 누구더라도 준비하는 것이 불문율인 상인들은 주문에 부족함 없이 마련해 둔다. 그러니 식당에서는 예약이 되어 있어 다른 손님을 받지 못하고 식재료는 신선도가 떨어져 버려야 하는 상황이다. 청과물 가게도 오래 두고 팔 수가 없으니 손해가 이만저만 한 게 아니다. 또 펜션은 그날 준비해두었던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손해가 만만치 않다.
결국 우려하던 대로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훈련 중 사고가 나서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남겼다. 휴대전화의 카톡으로 찾아 들어가자 그는 자신을 숨기고 침묵하고 있었다. 당당하던 목소리도 예의 바르던 문자도 모두 거짓이었다. 경찰에 신고해볼까, 별의별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행여 경찰이 찾아낸들 결과적으로 우리가 손해 본 것은 물질적으로 없으니 벌을 줄 명목도 없다. 사람을 믿고 목소리에서 풍기는 바름을 의심치 않았으니 나의 식견의 부족이다.
무엇이 청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군인이라는 신분을 훔칠 만큼 마음이 가난하고 어떤 심리적 기제가 사람을 속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게 되었을까. 누구든 살아가는 방식은 본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것처럼 밝고 바르게 살아가길 바란다. 훈련 중이라는 거짓으로 속임수를 쓰지 않는, 땀 흘려 일할 줄 아는 사람다운 청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