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저 기절할 것 같아요.”
“예, 알았어요. 조금 쉬세요. 신정 연휴 끝나면 사무실서 뵙지요.”
격앙된 내 목소리에 세무사는 나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퇴직금으로 시골 산속에 300평짜리 밭을 하나 샀다. 14년 전이다. 살 때 세금 내고, 남편 사후 상속받을 때 세금 내고, 혼자 경작할 수 없어 팔았더니 이익은커녕 내가 살 때 낸 금액도 못 찾는 형국이다.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 잠깐 잠이 들었다. 내 집에 온 신부님과 신자들의 행동이 기이했다. 사춘기 여자애들은 머리를 산발하고 집 안을 뒤졌다. 오래전 내게 집을 팔고 외국으로 갔던 박 교수가 또 내 집에 있었다. 내 감과 내 것이 아니라는 감이 여러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사람들의 행동은 폭력적이며 괴기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집 안 벽은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무서웠다.
그 혼란 속에서 나는 프랑스의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을 떠올렸다. 저 멀리 산 능선에 달빛이 하얗게 내렸다. 보름달은 군청색 하늘에 높이 떠 있는데 집시 여인이 모로 누워 거친 들판에서 잠이 들었다. 어미 사자 한 마리가 꼬리를 치켜든 채 그녀의 목덜미 뒤에서 냄새를 맡고 있다. 오른손에 있는 지팡이는 미동도 없이 그녀와 잠이 들었고 그녀 옆에는 만돌린 같은 악기 하나가 놓여 있다. '잠자는 집시'란 그림이다. 내 목 뒷덜미에서 어떤 호흡이 느껴져 깜짝 놀라 깨었다.
새해가 되었는데 마음이 들뜨기는커녕 내가 거친 벌판에서 잠자는 집시 여인이 된 꼴이다. 긴 여행에서 가진 것은 간편해야 하니 지팡이 겸 긴 막대기도 필요하고, 물병과 누워 잠을 잘 모포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최소한의 것을 준비하고 가는데 쉽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시스템과 쉽게 바뀌는 법을 몰라 헤매다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무식한 나에게 분노도 일었다.
늦은 밤까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돈을 잃는 것보다 엄마를 잃을까 걱정하는 아들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론을 냈다. 지금 나라가 비정상이니 나라를 떠나기 전에는 이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한다. 내게서 떠난 것은 깨끗이 잊고 지금 가진 것이나 잘 지키며 살자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마음에 번진 미소로 눈앞에 있는 노란 색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다. 박홍순 작가의 책 '미술관 옆 인문학'이다.
그 책 22페이지에 올더스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의 '멋진 신세계'의 대사가 있었다.
주인공 새비지는 과학기술 문명을 상징하는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편과 불안, 위험하게 살 권리를 주장한다.
새비지: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무스타파 몬드: “그러나 우리는 결코 불편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을 편하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니까요.”
새비지: “저는 편안한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를 원하고, 현실적인 위협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악을 원합니다.”
무스타파 몬드: “알 수 없군요. 당신은 불행하게 만드는 권리만 주장하고 있군요.”
새비지: “네 그래요. 나는 불행하게 되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늙어서 추해지고 무능하게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말할 수 없는 온갖 고통에 시달릴 권리...· .”
이게 무슨 말인가. 불편한 것을 좋아하고 현실적인 위협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하고 그리고 죄악을 원한다니. 그랬다. 집 밖에 화장실이 있어 밤에 화장실에 갈 때 귀신을 생각하며 떨던 때가, 가끔 식량이 모자라 보릿고개를 넘어도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 내 땅을 마련할 수 있었던 때가, 내 자유를 잠시 저당 잡혀서 나라의 번영에 기여하던 때가 그리웠다. 그리고 자유를 찾겠다고 정부에 대항했던 때가 차라리 사람답게 살았다는 듯이 그리웠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세금을 내고도 내 손엔 원금이라도 들어오면 좋겠다. 재개발 소식에 속아서 집도 빼앗기고 분노의 응어리를 담고 있다가 병이 들어 돌아가신 선생님도 있었지. 투자를 잘해주겠다는 제자에게 사기당하고 정신없이 오다가 차 사고로 간 친구의 남편도 있었지.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보다는 적금을 부어 집을 사려다 대출 사다리마저 없어져 집을 못사는 조카도 있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산다. 오늘도 세상에 휘둘리다 가슴이 미어지는데 내일 일을 걱정할 겨를이 없다.
이 일 저 일 처리하러 다니다가 밥도 못 먹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우선은 밥을 먹어야겠다. 보약 한재 지어먹고 정부에서 주는 연금이라도 오래 받아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다. 창가로 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맑다. 팔을 쫙 벌리고 기지개를 한껏 켰다. 그래! 오늘을 잘 버텨야 내일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