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수필가
얼마 전 그녀의 레스토랑에 갔다. 지방 도시의 터미널 앞이라 찾기가 쉬웠다. 들어서자마자 식물원 같은 실내에 눈이 커졌다. 키 큰 벤저민과 아레카야자가 테이블 사이에 있고, 빨간 포인세티아와 해피트리는 발아래도 보라는 듯 웃고 있었다. 감미롭게 흐르는 음악처럼 그녀의 삶도 부드럽게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레스토랑 연 것도 충격인데 웬 식물이 이리 많아?”
실내를 둘러보며 그녀가 걸어온 길을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 전쟁 때에 남편을 잃었다. 핏덩이 아들 하나와 거처를 찾다가 시골의 조금 넉넉한 집에 몸을 의탁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안주인이 출산하게 되었는데 노산이어서 여러 달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정성을 다해 간호했고 주인집 여자는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바깥주인은 손이 귀하다는 핑계로 그녀 어머니 방을 찾았고 그들 사이에 딸이 생겼다. 그 딸이 그녀다.
그들은 안주인과 한집에서 살았다. 잘사는 부부 사이에서 불편하게 살지 말고 다른 곳으로 재가하라는 친정 부모의 권유를 따르겠다고 안주인에게 전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떠했는지는 모르나 그녀의 어머니는 안주인이 골라 준 남자에게 시집갔다. 안주인의 품에서 자란 그녀는 결혼하고서도 살기가 팍팍했다. 작은 가게를 얻어 잡화와 막걸리를 팔면서 새우잠을 잠을 자는 그녀를 바라본 세월이 십여 년이다. 그런 그녀가 번듯한 레스토랑을 번화가에 낸 것이다.
그녀가 음식을 앞에 두고 식물이 오게 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의 큰아들인 배다른 오빠가 작은 트럭에 화초를 가득 싣고 왔다고 했다. 그녀도 그 일이 믿기 어려운 양 자꾸 실내를 둘러보았다. 결혼 후 겨우 연결이 되어 전화 통화를 몇 번 했고 레스토랑 개업 소식을 전했더니 반가워하며 얼른 달려왔단다. 그리고 오빠와 처음 맥주 한 잔 놓고 나눈 대화를 내게 흘렸다. 그녀가 먼저 물었단다.
“오빠는 핏덩이 떼어놓고 재가한 엄마가 원망스럽지 않았소? 나는 나를 놓고 간 엄마를 많이 원망하며 살았는데.”
그 오빠가 웃으며 대답하더란다.
“나를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것만도 고마운데 무슨 원망을 해?”
그리고 처음 만난 여동생에게 푸른 희망을 구석구석에 놓고 갔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눈웃음으로 남기고…….
정치가 엉망이니 경제가 무너져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친다. ‘희망’이란 단어를 생각하는데 전에 읽은 기사가 생각났다. ‘콤플렉스가 나를 키웠다’란 제목이었다. 부족하여서 열심히 일했고, 공부하지 못했기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궁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문가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성공했다는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다는 기사였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란 속담을 희망으로 안고 살았나보다.
기사를 생각하다 다시 그녀를 떠올렸다. 갓 낳은 딸을 업고 내 집 문을 두드리던 때가 생각나서다. 언니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언니 옆에 살러 왔다고 했다. 아이도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아이들이 자랄 때 장난감 하나 사주는 것을 못 보았다. 가게에 물건을 들일 때도 외상없이 하느라 물건이 있어야 할 선반이 군데군데 비어 있을 때가 많았다. 홀로 서야 하는 것을 잘 알기에 남에게 의지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 온 것이다. 그녀의 오빠도 비슷한 삶을 살아왔기에 개업 소식에 트럭 가득 초록을 싣고 달려온 것이 아닐까?
내 품을 떠나 혼자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는 아들들이 궁금했다. 고생하지 않고 살길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그 길을 스스로 찾아가길 기도한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말길 기도한다. 부족한 부분을 알고 노력하길 기도한다. 하나 더 바란다면 긴 인생길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바른길 찾아가는 마음속 내비게이션 하나 갖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과 따뜻하게 교류하며 갈 수 있는 내비게이션이면 더 좋겠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의 자리에 있던 흐뭇한 커피 향이 싱그러운 해피트리의 그림자 아래로 와서 내게 속삭였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