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

극한 호우가 물러가고 다시 극한 더위가 반복되는 나날이다. 무더위가 불볕더위로 다시 찜통더위를 거쳐 가마솥더위로 이어지면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곤혹스럽다. 이제 처음 겪는 무더위라거나 가장 뜨거운 밤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이번 폭염은 북태평양고기압과 티베트고기압이 한반도를 겹겹이 덮는 상황인 이중 고기압 현상이라고 한다. 여기에 하층 저기압 때문에 남동풍이 불면서 가장 더웠던 대구지역보다 수도권 서쪽지역이 유달리 더워졌다. 낮과 밤을 불문하고 하루 종일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래저래 정말 불편하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자연은 숨결을 멈추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한강 올림픽도로 주변 숲에서 풀벌레와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려온다. 지금까지 힘들게 견뎌왔던 세월의 상처를 위로하는 합창소리가 들려오듯 가슴이 한결 시원하고 편안하다. 아파트 창가에서 바라보이는 남산이 한강을 가로질러 환하게 열려 있다. 백옥 같은 하얀 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는 파란 하늘과 푸른 물결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는 점점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린다. 숲이 점점 울창해지고, 어린아이의 몸집이 점점 자라나고, 슬픔이 점점 사라지고, 분노가 점점 사그라지고, 아픈 몸이 점점 나아지고, 누군가가 점점 좋아지는 등 서두르지 않는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인생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여전히 무수한 점점으로 이어진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밤이 점점 길어지는 절기가 지났고, 가장 덥다는 대서가 지나고 입추와 말복도 지나갔다. 당분간 더위가 지속된다는 전망으로 조금 당혹스럽지만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인생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디로 가야할지 목적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세상의 바다를 향해 떠나간다. 설령 목적지에 도착하였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잠시 쉬어갈 틈도 없이 또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이것이 겨우 이룬 행복이나 만족조차 오래 간직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노력보다 자신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순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바람직하다.

이른 아침 주변 야트막한 산 정상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모처럼 뜨거운 열기가 가슴 깊이 스며들어 지친 마음이 열정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자주 듣고 부르는 노래가 떠오른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였소.’ 은혜라는 제목의 가스펠송 일부다. 순간 뜨거운 감정이 하염없이 밀려와서 가슴이 뭉클해지며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언제 깨닫게 될까.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건강이 어느 순간 사라질 때, 사랑하는 가족이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할 때, 가까웠던 친구가 홀연히 떠나갈 때, 어려운 형편으로 하루 세끼조차 힘들어질 때, 정말 가고 싶은 곳을 혼자 걸어서 들어가지 못할 때 등이 아닐까 싶다. 지나간 모든 순간이 항상 곁을 지켜준 가족과 친구가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속담을 이해할만하다.

생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어머니는 평생 자식을 위한 기도를 드리셨다.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기도가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치 사랑받는 일에만 익숙한 아이처럼 잠깐 고마움을 느낄 뿐 감사의 마음이 점점 사라졌다. 언제나 필요한 것을 마냥 주시리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일이 안타깝다.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의 모든 순간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진정 은혜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피어난 꽃들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여름철에는 열정과 인내, 순수와 그리움을 상징하는 꽃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강렬한 햇살 속에서도 우뚝 서 있는 희망과 존경의 해바라기, 아침에 피었다가 밤이 되면 시드는 순수한 사랑의 나팔꽃, 아침에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청결과 영혼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연꽃이 대표적이다. 꽃은 필 때가 되면 당연히 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마냥 스쳐지나갔던 일이 아쉽다. 세상사에 지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꽃들에게 위로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진정 감사하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일상으로 다가오는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무런 흥미조차 없는 권태로운 상황일지라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는 간절하게 소망하는 평범한 일상이다. 넘어질 줄 아는 사람만이 일어서는 법도 배운다고 했던가. 태풍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밤에도 먹구름을 꿰뚫어볼 수 있는 차분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게 한다.

일상성이 가져다준 것에 익숙함이 반복되면 망각을 불러온다. 아침 해가 뜨고 저녁 어둠이 온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진정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설렘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감사를 잃어버리면 기쁨이 사라지고 교만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그 모든 것, 그 모든 시간, 그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진정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바로 은혜였다.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해준 모든 것들이 진정 축복이고 은혜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뜨거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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