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박재명 수필가
아파트 정원석 바위 틈에서 범부채라는 아이를 처음 만난 지 벌써 5년이나 지났다. 그 후로 이 아이는 시름시름 야위어 갔다. 어느 해는 날카로운 예취기에 싹둑 잘려 나가기도 하고, 또 몇 해는 운명을 다했는지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런데 올봄, 그 자리에서 가냘픈 싹을 틀어 올렸다. 그러나 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처지였다.
올여름 더위가 징글징글하다. 6월에도 심상치 않게 덥더니 7, 8월이 되자 성난 땅벌처럼 더 극성을 부린다. 밤 11시가 되어도 33도를 가리키는 더위가 식을 줄 모른다. 하루도 거르지 않은 열대야가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지 꼽아 볼 손이 모자랄 정도다. 이 더위에 풀들도 자주 풀 죽었다.
한편, 범부채도 재기에 성공했으나 기운을 잃고 무더위 고비를 겨우 넘겨 키를 키웠다. 그리고 선명한 호반(虎斑)을 가진 주황색 꽃을 피웠다. 이대로라면 5년 전처럼 두어 달 지나 임신도 하고 무사히 출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어난 지 3년이 지난 손녀는 이제 어엿한 동생도 얻었다. 어린이집에 처음 다니면서 몇 달 동안 감기를 달고 살았다. 아이가 아프면 등원시키지 말아야겠지만, 그런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다. 요즘 부부들은 대부분 맞벌이로 등원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감기든 뭐든 막을 대책이 없이 감기로 고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원시적이지만 아이 스스로 면역을 획득할 때까지 이겨내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출가한 아이는 처음부터 아이를 갖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동생을 가질 때도 그랬다.“왜?” 하고 물어보면 해마다 악화하는 기후 환경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걱정된다고 했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필자 역시 기후 환경 변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이나 아이들 생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견딜 수 있겠지만, 그다음 세대까지는 장담하기 어렵겠다는 두려움이 있다.
지구 온난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도 환경 오염은 곳곳에서 자행된다. 그러나 인류 과학이 미래의 위기를 구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현명한 국가에서도, 국제 사회도 대책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속도를 보면, 위기가 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럴 때는 각자도생인가? 어린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스스로 면역 획득할 때까지 고통을 참으며 이겨내야 하는 것처럼, 사라질 뻔한 범부채가 몇 년간 고난을 이겨내고 스스로 다시 꽃을 피운 것처럼, 우리도 위기 속 환경 앞에서 각자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건가?
우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환경 쓰레기가 생산된다. 현대인의 삶이 원시적으로 돌아가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주하는 환경 재앙을 뻔히 보면서도, 잘 알면서도 생활 속 오염 쓰레기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모습이 두렵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개발하는 공약이 끝없이 넘치고, 그 과정에 환경을 불가피하게 훼손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도 보기에 두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