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칼럼] 김진웅 수필가 

‘내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더 많이 쓰고 부르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이름이다. 이름처럼 많이 쓰는 것도 없고, 이름에 관한 명언도 많다.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탈무드’, ‘말이 씨가 된다. 이름값 한다. -한국’, ‘이름에 모든 것이 있다. -불가(佛家)’,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등

유난히도 더운 올여름에 유용하게 사용한 것 중에 선풍기가 있다. 에어컨이 더 좋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별 부담 없이 총동원하는 것이 선풍기이다. 수십 년 전에는 선풍기도 귀해서 한 대를 가지고 이 방 저 방으로 옮기며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요즘 청소년들은 알까. 필자네 집에 기특한 선풍기가 하나 있는데 음성으로도 작동할 수 있어 신기하고 편리하다.

음성으로 작동하려면 우선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마치 선풍기가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불러줘요.”하는 것 같다. 인공지능(AI)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빠르게 진화하면서 우리 삶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는데, 선풍기 정도는 시시한 것 같지만 신통하고 깜찍해서 “헬로 선풍기”를 자주 불러준다.

어떤 때는 “헬로”, “선풍기”라고 약칭으로 불러주면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헬로 선풍기~”하면, “네~”하는 대답이 “깩~”하는 기계음으로 들릴 때 웃음은 덤이다. “선풍기 켜줘.” 하자마자 “작동을 시작합니다.”하고, “3단으로 틀어줘.” 하면 “알겠습니다.”, “선풍기 꺼줘.” 하면 “작동을 중지합니다.” 할 때는 뚱딴지같은 사람보다 상냥하다.

‘내 이름을 불러줘’라는 러시아 영화도 있다지만, 우리는 매사에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그냥 건성으로 부르지 말고 정을 듬뿍 담아 부를 때 소통하고 진심이 통한다.

대학생 때 종교단체의 위문활동으로 청주교도소를 갔던 생각이 난다. 형평성과 공정성 유지 등 때문에 수용자의 이름 대신 수용 번호로 부르는 관행이 있었다. 최근에는 인권 차원에서 이름과 번호를 병용하기도 한다지만…….

김춘수 시인이 ‘꽃’에서 읊은 것처럼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뜻깊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이 시에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존재를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그와 나는 특별한 관계로 승화하는 것이리라.

이름은 단어와 같다. 쓰이지 않으면 의미를 읽고 곧 생명을 잃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제 역할을 하며 생명력을 얻는다.

41여 년 교직(敎職)에 몸담다 정년퇴직한 필자는 이름에 대해 사연이 많아 감회가 깊다. 출석을 부를 때 그저 나열된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고, 학생 상태를 살펴보며 교감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는 한 학급 인원도 많아 출석을 부르는 데도 오래 걸렸는데, 요즘 소인수 학급은 한 번 둘러보면 될 것이다.

특히 오랜만에 만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었을 때 무척 좋아하고 더욱 친근해지는 것만 보아도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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