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날씨가 이미 가을이 완연하게 다가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 밤 불어오는 비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내는 손길이 바쁘게 움직인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나뭇가지 위에 쏟아지는 순간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은 더욱 깊어간다. 수필집 한권을 손에 들고 해가 질 때까지 마냥 걷고 싶은 마음이다. 해가 지는 거리를 걸어가다가 가로등 불빛이 들어올 무렵 하늘을 바라보니 그리움이 물밀 듯 밀려온다.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한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달이 시월이라는 말을 이해할 듯하다. 한강을 가로질러 길고 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에서 포근한 가을의 기운이 느껴진다.

가을은 꽃의 마지막 무대라고 한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밀어내는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꽃들은 오히려 더 짙어지고 선명하게 빛난다. 초록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둥근 꽃 댑싸리, 하얀 소금을 잔뜩 뿌려놓은 메밀꽃, 솜뭉치 같이 부드러운 수국이 활짝 피어났다. 주변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황화 코스모스와 순수와 어머니의 사랑을 간직한 구절초까지 다채로운 꽃들이 그려낸 풍경화가 장관이다. 들판을 가득 채운 꽃들 사이를 걸어가는 순간 꽃향기가 가슴을 스치듯 다가온다.

나이 탓인지 일상에서 사소하지만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두고 나오는 일이 종종 나타난다. 그야말로 기억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아파트 현관을 나설 때마다 다시 확인하는 의례적인 의식을 갖는다. 매번 한 가지는 놓고 나오거나 잊는 경우가 일어나다보니 조금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요즘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가진 분야를 공부하거나, 신문이나 책을 볼 때 목소리를 내면서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림자처럼 엄습하는 변화를 느끼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이다.

얼마 전 중국 톈안먼 망루에 나란히 서 있는 북·중·러 정상의 사진과 광화문 광장에서 여야를 지지하는 진보와 보수가 깃발을 흔들면서 대치하는 모습의 사진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이 장면이 국내외 정세에 걱정과 불안을 안겨주지만 조만간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질 것이다. 누구의 인생인들 모든 순간이 쉽고 즐겁기만 했을까? 인생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주제가 있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더욱 은혜롭게 나이 들어가고, 세상 마지막 순간 절대자의 자비 앞에 서는 날을 기다리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또 나름 발전하면서 다가오는 세상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이다.

티베트에서 사람의 몸을 루라고 부른다. 세상을 떠날 때 육신을 두고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젊은 시절 강원도 정선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추억이 있다. 강을 건넌 다음 나룻배를 청소하고 밧줄에 묶어 놓는다. 나중에 다음 사람이 와서 탈 수 있도록 두고 간다. 강을 건넌 다음 나룻배를 밧줄에 걸어두고 가듯, 사람도 저 세상으로 건너갈 때 가진 것을 모두 두고 가는 것이다. 세상을 건너고 나면 육신은 다시 새가 되고 꽃이 될 것이니 함부로 쓰지 않고 향기롭게 남겨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코로나사태 당시 친구와 청계산을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드럼강좌 안내를 보고 배우기 시작한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친구와 함께 노래를 듣고 드럼을 치면서 온몸이 적셔질 정도로 땀을 흘리면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보낸 듯 시원하다. 서로 알 수 없는 다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을 만나 서로 걸어온 삶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인생의 바퀴가 우주를 돌아와서 맺은 소중한 인연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수레바퀴 같은 인생의 여정을 은혜롭게 마무리하는 일이 소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적한 시골 기차역은 기다림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장소이다. 세상은 아직 기다림의 기회를 가져다주기에 고마운 존재다. 본래 연약한 인간이라서 약속한대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래서 사랑도 인생도 더욱 아름답다. 한가로운 오후에 안동역에서라는 유행가가 들려온다. ‘사랑은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지워야할 꿈’이라는 노랫말처럼 그리움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이 운명적인 삶이다. 이제 가을의 시작에 들어섰지만 첫눈이 내리는 날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상상을 한다.

끝없이 펼쳐진 분홍빛 보랏빛 물결이 가슴에 들어서는 순간 꽃과 하나가 되어 화려하게 물들어간다. 사탕처럼 동글동글한 꽃송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본래의 화려한 자태를 내뿜는다. 한여름 무더위에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천일홍은 햇살을 듬뿍 받아 여전히 더 진한 화려함을 발산한다. 아파트 화단 돌 사이에 피어난 풀꽃이라 여기며 스쳐지나갔던 꽃이 공원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와서 정말 놀랍다. 은은한 꽃향기는 오래 남고, 길게 펼쳐진 꽃물결은 마치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잔잔하고 편안하다.

벌써 부지런한 사람들은 커다란 주황색 호박을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한 해가 점점 저물어간다는 사실이 순간 밀려온다. 방향은 알 수 없어도 계속 걷는 동안 길은 생겨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산다는 것은 오지 않는 사랑과 꿈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지라도 세상은 아직 고맙다. 인생의 완성되는 시간까지 살아가는 하나의 원칙은 그다지 가진 것 없을지라도 품위와 내면의 행복을 유지하는 일이다. 하루하루 찾아오는 소소한 일상을 확실한 행복으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기다림이다.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가을꽃과 어우러져 가슴이 더욱 따뜻해지고 풍성해지는 시월의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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