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김창주 청주대학교 물리치료학과 교수·석우재활서비스센터장
대학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나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에게 발달과 성장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나 자신이 그 과정 안에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교육이란 한 방향의 전달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고받는 환경적 상호작용의 과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피아제(Jean Piaget)는 인간 발달을 ‘적응(adaptation)’의 연속으로 보았다.
아이들은 단순히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동화(assimilation)하고 조절(accommodation)하며 사고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그는 학습을 외부 자극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내적 구조와 환경 간의 역동적 균형이라 했다. 브론펜브레너(Urie Bronfenbrenner)는 이를 확장하여, 인간 발달은 가족, 학교, 사회문화적 체계가 얽힌 생태학적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아이는 가정의 분위기, 교사의 태도, 사회의 가치 속에서 자신을 형성한다. 결국 발달은 개인 내부의 변화가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과정이다. 이 관점은 교육과 재활 현장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가정에서 부모의 감정이 안정적일수록 아동의 정서는 건강하게 자라고, 교사가 학생의 의견을 존중할수록 수업의 몰입도는 깊어진다.
결국 성인의 태도는 아이의 환경이자 발달의 토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실천으로 ‘상호작용’을 회복할 수 있을까.
첫째, 교육과 소아물리치료 현장에서 일방향 지시형 대화보다 상호 피드백 구조를 강화해야 한다. 소아물리치료 현장에서 아이는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예컨대, 치료사가 아이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 반응을 언어로 되돌려주면, 아이는 통제받는 존재에서 ‘참여자’로 전환된다. 그때 치료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 속 신뢰의 경험이 된다. 그렇기에 필자 역시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자주 던진다. 처음엔 답을 망설였다. 틀릴까 봐, 혹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학기가 거듭될수록 변화가 보였다.
지난 3월엔 조용하던 학생들이 이제는 “제 생각에는요…”라며 스스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배움이 ‘가르침의 결과’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산물임을 실감했다. 둘째, 성인 스스로의 성장 목표를 세워, 아이와 함께 배우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인 셋째 아들이 받아쓰기 숙제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삐뚤삐뚤한 글씨를 보며 “왜 집중 안 하니? 더 잘 써야지.”라며 다그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나이 땐 이보다 더 못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선을 바꾸자, 아이를 혼내기보다 함께 방법을 찾고 싶어졌다. 그래서 “글자를 네모 칸 안에 그림처럼 그려볼까?”라며 제안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금세 흥미를 보였고, 우리는 글씨 연습이 아니라 그림 그리기 경쟁을 하듯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날 아들의 글씨는 더 또렷해졌고, 나의 마음은 더 따뜻해졌다.
결국 배우는 것은 아이만이 아니었다. 나도 함께 자랐다. 아이의 성장은 어른의 거울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른의 성장은 아이의 순수함 속에서 다시 깨어난다. 결국 인간의 발달은 환경에 단순히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아이도 어른도 서로의 환경이 되어주며 성장한다. 그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함께 자라는 존재’가 된다. 아무리 채워도 부족한 강의의 여운처럼, 나의 일상도 배움의 순환 안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