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사과나무 꽃이 지면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꽃이 지면서 사과나무 잎이 푸르게 무성해지면 개울 건너 외딴집인 우리 집은 외부로부터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럴 때면 우리 집은 동네에서 외떨어진 작은 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쩌다가 개울을 건너 동네 고샅을 지나 주막집에 막걸리 심부름 가는 길은 신바람이 났었다. 오는 길에 개울에 발을 담그고 몇 모금 마신 막걸리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막걸리를 마실 때면 투박한 잔 속에 그 여름날의 기억들이 가득 담긴다.

아버지께서는 사과나무에 소독약 분무를 하시다가 땀을 닦으시며 막걸리를 맛있게 한 잔씩 드셨다. 그때 우리 형제들은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수동식 소독기 펌프질을 하고 누군가는 소독약이 가라앉지 않도록 휘휘 저어주며 또 한 동생은 사과나무 골골이 소독 줄이 엉키지 않게 잡아주는 몫을 했다.

지금처럼 농사일이 자동화가 아니고 수동식이었던 그때는 식구가 많은 것도 한 몫을 했다. 부지런하고 근면하셨던 아버지께서는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절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셨다. 사과 알이 어느 정도 영글 때까지 아버지와 우리의 일요일은 사과나무 소독하는 날로 보냈었다.

동생들과 재잘대며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과나무 담장가에 주황색 꽃무늬 양산을 든 여인이 기웃거리는 모습이 사과나무 사이로 얼핏얼핏 보였다. 그녀는 담장 밖에서 서성거리며 과수원 안쪽을 향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계속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와 아버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작은 심장이 뛰고 이 상황을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엄마도 동생들도 아무도 이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 소독 대를 놓으시고 우리에게는 잠시 쉬라고 하시며, 땀에 젖은 흰 메리야스 위에 반팔 셔츠를 서둘러 걸치고 나가셨다. 주황색 꽃무늬 양산도 보이지 않았다. 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휴식을 즐겼지만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도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비밀스런 고민이 어떤 해결점도 찾지 못하고 있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아버지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오셨다. 다시 소독 일을 묵묵히 하고 계신 모습을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이후 여름 내내 주황색 꽃무늬 양산은 담 너머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곧바로 돌아와 소독 일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나마 내가 아버지를 두고두고 신뢰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었다. 아버지는 호방하신 분이셨지만 타인에게는 완고하셨고 본인에게는 더욱더 완고하셨던 분이셨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께서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그날 내 안의 비밀이 용광로같이 끓어 올라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매사에 완고하신 분이라고 주문처럼 자주 말씀하셨었다.

훗날 어느 기와집 담장에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 꽃을 보고 그제야 그녀가 썼던 주황색 양산이 능소화 꽃무늬 양산이란 생각이 들었다. 넘보지 못할 사랑을 하던 여인의 슬픈 전설이 있는 꽃이 능소화이다.

옛날 궁궐에 소화라는 아름다운 궁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밤의 인연으로 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임금은 두 번 다시 소화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하루하루 그리움에 사무쳐 담 너머로 혹여 님의 발자국 소리라도 들을까! 목을 길게 빼고 담장가를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으면서 임금의 그림자라도 밟게 해달라고 담장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그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능소화라는 전설이다. 올해가 아버지의 10주기인데 나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되면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