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어른도 읽어 볼 만한 그림책 추천 목록이 있어 몇 권 고르게 되었다. 이순옥 작가의 ‘틈만 나면’도 그 중한 작품이다. 겉지를 넘기자 콘크리트 바닥이 그려져 있다. 무채색의 표면에 작은 틈이 보이고 연둣빛 점이 찍혀 있다. 다음 장에는 여린 풀잎이 자라나고 다시 한 장 넘기자 이번에는 세월이 느껴지는 어느 집 담장에 푸르른 생명이 수줍게 피어났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만나게 되는 풀은 인도의 한 귀퉁이에서도 미소를 짓는다. 배수구의 옆이건 안전바의 아래여도 상관없다. 그 모습은 결연하기까지 하다.

풀은 쓰레기를 모아두는 전봇대 앞에도, 햇볕을 쬐느라 내어놓은 화분에도 살며시 눌러앉는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설사 본인을 위한 자리가 아니래도 용기 있게 엉덩이를 디민다. 한 줌의 흙과 하늘만 있다면 그 어디든 괜찮다. 쭈욱, 쭈욱 뻗어나가 담을 타고 올라가 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혹여 그에게 밟히더라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용기 내어서 다른 세상까지 가 보고 싶은가 보다.

풀은 사람이 무시로 지나다니는 보도블록 사이에서도 틈만 나면 자리 잡고 위험한 일을 겪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솟아난다. 그림과 어우러진 이야기를 읽다 보니 다시 첫 표지부터 처음 읽는 것처럼 들여 다 본다. 아니 그냥 그림 속으로 들어가 몇 글자 안되는 글을 찾아 마음대로 소리 낸다. 그리고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푸르른 생명이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감하게 살아 내는 모습이 사람의 삶과 닮아 울컥하고 올라온다. 그것은 하필이면 지난한 나의 인생과 마주한다. 한 발자국 떼는 것조차 두려움으로 바들거리던 때가 있었다. 언뜻 보면 추수를 끝낸 빈들의 허수아비 같은 고독한 시간이었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서너 번을 반복하여 읽어보니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옮겨 놓은 것일까. 쓰고 그린 이의 마음마저 헤아려진다. 마지막 부분은 민들레 홀씨가 하늘을 날아다니다 작은 틈에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운다. 아슬하게 아이의 자전거 바퀴가 밟고 지나가지만 끝내 꽃을 피우는 당당함이, 그리고 처연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글이 없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읽혀진다.

그림책의 끝자락에는 작가의 에필로그가 놓여 있다.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태어나는 풀들을 보며 사랑스럽고 애잔하고 때론 위로를 받습니다. 꼭 우리 삶의 몸짓과 닮아 보여 한참을 바라보게 됩니다. '

햇볕을 쬐려 나선 산책길에서 보도블록 사이에 자리 잡은 풀을 보며 내심 기특하게 여겨왔던 날들이 떠오른다. 작가는 우연히 마주친 이웃처럼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림책 ‘틈만 나면’은 서늘했던 일상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한다. 한 줌의 흙과 하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그런 용기와 따뜻함으로 남겨지는 풀이 되고 싶은 것은 그저 미흡한 인간의 욕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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