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안세림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다가온다. 소란스러운 여름이 물러가고,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계절의 손끝이 우리 마음에도 닿는다. 바람은 차가워졌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뜻하고, 하늘은 어느 때보다 높고 투명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가을은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이라고. 아마도 그건, 자연이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라 속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나는 바쁜 일상에서 자주 ‘쉼’에 대해 생각한다.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살게 되었을까’ 우리는 늘 ‘해야 할 일’의 목록 속에 묻혀 살면서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잊는다. 스마트폰 알림음에 반응하느라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이 없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다음 약속을 걱정한다. 그러나 가을은 그 모든 소란을 잠시 내려 놓고 ‘괜찮다, 잠깐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계절이다.

어느 시인은 “가을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했다. 나무는 천천히 잎을 떨어뜨리고, 들꽃은 마지막 향기를 남기며 고개를 숙인다. 자연은 매 순간 변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조급함이 없다. 변화조차도 여유롭다. 우리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서둘러 피어나는 성공보다, 천천히 무르익는 성숙이 더 값질 때가 있다.

가을에는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긴다. 퇴근길, 저녁놀 속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면 괜히 발걸음을 멈춘다. 오렌지빛 노을이 구름 위로 스며드는 순간, 세상의 시끄러운 일들은 잠시 잊힌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아, 나도 저 하늘처럼 한결같이 살고 싶다. 바쁘게 흘러가면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쉼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조용히 차를 한 잔 우려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말할 용기를 내는 일. 이런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우리를 다시 단단하게 만든다.

한때는 쉼이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쉬는 건 살아가기 위한 준비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고 해서 뒤처지는 게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호흡’이라는 것을. 가을의 들녘처럼, 때로는 비워야 더 아름답게 채워진다.

도시의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꼭 많은 걸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든다. 바람이 불고, 잎이 지고, 다시 봄이 오듯 모든 것은 순환한다. 우리의 마음도 그 자연의 일부다. 지금 힘든 일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새로운 시작이 또 올 것이다.

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감사’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 수 있고,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넬 수 있으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을은 지나가겠지만, 그 안에서 배운 ‘쉼의 미학’은 오래 남는다. 잠시 멈춰 바람을 느끼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내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는 일. 그것이 바로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선물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