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시샘하듯이 바람은 세차게 흔든다. 학교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이맘때가 떠오른다. 점심때가 지나면 그녀가 매장으로 들어섰다. 콧등은 늘 반들거렸고 빗이 지나간 흔적이 없는 단발머리는 엉겨 있었다. 땟국물이 묻은 손으로 천원 권 지폐 두 장을 동전으로 바꾸는 동안 깡마른 칠순의 노모가 서리 맞은 해바라기처럼 서 있었다. 그래도 눈동자는 딸의 몸놀림을 따라 움직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장 안 공중전화와 사랑을 속삭인다. 달콤하게 시작하여 어르고 달래다가 화를 내뿜을 즈음엔 욕설이 난무한다. 동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지치지도 않는지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뒤에서 의자를 끌어다 앉았던 노모는 딸의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졸고 있었다. 매장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힐끗거리고 이웃에 사는 이는 그녀가 알아볼세라 물건을 빠르게 골라 들고 나간다. 외근이 있었는지 면사무소 직원들이 음료수를 마시러 들어 왔다가 봉변을 당했다. 밑도 끝도 없이 면사무소에서 팔아먹었으니 책임지라고 억지를 쓴다.
가만히 그녀의 통화 소리를 들어 보았다. 면사무소 직원에게 몇 번지의 땅 소유주는 자기인데 남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고 생떼를 썼다. 그 후로도 거르지 않고 전화기와 씨름하던 그녀는 타지에서 성직자의 길을 걷는 남동생에 의해서 기도원에 보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 사랑방의 노름판에서 막걸리 심부름하고 개평을 얻어먹었다. 어느 해는 외지에서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들어와 며칠간 묵은 적이 있었다. 언 듯 보기에 어설퍼 보이는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노름판에 끼게 되었고 매일 푼돈을 따던 마을 사람들은 아예 사랑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너도나도 노름판의 방석에 앉은 밤, 그녀의 아버지도 일 년 내내 농사지어 마련한 돈을 들고 한 자리를 차지했다. 어찌 된 일인지 잃기만 하던 외지 청년들이 계속 따자 밤새워 집을 오가며 마을의 아버지들은 소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땅문서를 들고 왔다. 아침이 밝아오자 외지인들은 떠나고 빚만 남았다.
몇 마지기 짓던 농사치를 모두 빼앗기자 그녀의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여 나무 살부터 남의 집의 머슴살이를 하다 살림을 내면서 손바닥만 한 밭뙈기와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을 얻었다. 평생 남의 집 허드렛일로 논 두 마지기를 마련했는데 그것을 하루 밤새 날렸으니 어디 사람으로 살아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그녀의 아버지는 끼니도 때우지 못할 만치의 가난을 물려주고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순수함을 가장해 가면을 쓴 노름꾼들에게 현혹되었던 농촌의 아버지, 그만을 탓할 수 있을까. 그런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을 것이다. 노랗게 나부끼던 은행잎이 바닥에 나뒹굴고 지나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은행잎을 지르밟으며 걷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