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신팔균 (申八均·1882년 5월 19일~1924년 7월 2일)

 

서울 정동 출생, 본향은 진천군
1900년 무관학교 보병과 입교
사립 보명학교 설립해 교육운동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당 조직
신흥무관학교서 독립군 양성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신팔균 장군은 일제 강점기에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만주(滿洲)를 무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독립투쟁(抗日獨立鬪爭)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무장투쟁가다.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등과 함께 독립군 인재(人才)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다.

신팔균 장군은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으며 본향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다. 

부친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등을 역임했으며 조부 신헌(申櫶)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을, 고조부 신홍주(申鴻周)는 순조(純祖)때 훈련대장을 지냈다. 

특히 조부는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돼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측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체결해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해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후 1903년 9월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황실 경위와 의장대의 성격을 띤 근위보병대에서 복무하다 1909년 7월 육군(陸軍) 정위(正尉)로 진급했다.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군복을 벗어버렸다. 

그 후 향리인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 청소년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사립 보명학교(普明學校·현 이월초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각 지방의 의병부대 및 전국 각지의 애국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준비했다.

1909년 전국의 애국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당은 안희제(安熙濟)·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서상일(徐相日)·남백우(南百祐) 등 근대적 교육을 받은 80여 명의 애국청년들이 참가해 조직한 단체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해 광복 시까지 존속한 비밀 청년단체였다. 

1910년 8월 마침내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되자 남은 여력을 모두 결집시켜 무력(武力)을 키운 다음 일제를 일시에 구축(驅逐)하기로 했다.

선생은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해 북간도 일대의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徐一)과 함께 중광단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3.1운동에 앞서 동삼성(東三省)의 민족지도자 38인 중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서명, 발표한 바도 있다. 

이후 경학사가 발전돼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소속의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1918년경부터 동군단 무관학교이자 독립군 간부의 중추적인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에 임명돼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진력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일제의 주재소, 헌병대 등을 습격하고, 일본 군경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는 한편 친일(親日) 주구배들을 숙청(肅淸), 군자금모금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명성을 떨쳤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 등은 북만의 밀산(密山)까지 이동해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조직해 연해주까지 이르는 장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연해주로 이동하지 않고 만주에 잔류하고 있던 서로군정서, 광복군총영, 대한독립단, 광복단 등 나머지 독립군 병력은 장백, 안도, 안동, 임강, 홍경 등 남만지역으로 이전해 새로운 항전기지(抗戰基地)를 구축했다. 

선생도 그를 따르는 부하들을 인솔하고 홍경현으로 옮겨 재기의 준비를 했다. 

1922년 8개 단체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소속 독립군은 대한통의부 의용군으로 새로 편성했다. 

선생은 1923년 김창환(金昌煥)의 뒤를 이어 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돼 대한통의부의 총 군사력을 지휘하게 됐다. 

하지만 통합단체로 결성된 대한통의부는 오래지 않아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신진세력과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구세력간의 이념 갈등으로 통의부의 지도이념과 인선 및 조직상의 이견(異見)이 발생해 분리됐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선생을 비롯한 김동삼·오동진(吳東振)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통의부를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1월 5일 평북 창성군 후평 소재 일본주재소 습격 △5월 28일 초산군 판면(板面) 일본주재소와 면사무소 습격 △6월 28일 초산군 서면 연담리(面蓮潭) 일경 사살 △8월 강계 회룡동 부근에서 일제의 경찰대 섬멸 △9월 21일 희천(熙川)군 문명(文明)동 일본주재소 습격 등의 활약을 했다. 

1924년 초 사령관으로 취임한 선생은 양세봉(梁世奉)·문학빈·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재만 친일주구배의 숙청을 목표로 유하, 통화, 집안지역에 일제 거류민회와 보민회를 습격, 소탕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동년 7월 2일 선생이 홍경현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리(密林里) 산곡(山谷)에서 야외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 300여 명이 포위해 불의의 기습공격을 했다. 

독립군은 황급히 전열(戰列)을 갖추어 교전(交戰)하면서 대원들을 안전지대로 후퇴시켰으나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부하들이 사령관을 부추기려 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쓰러진 부상병을 먼저 후송토록 명령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이때 다시 총탄이 선생의 흉부를 관통해 쓰러지고 말았다. 중대장 김하석(金河錫)이 달려들어 선생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향년 42세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운명을 하던 순간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더니 무관한 중국사람과 싸우다가 죽는구나"하며 통분해 했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들 중국 마적들은 일본의 통화(通化) 영사분관(領事分館)의 사주를 받은 중국 장작림 군벌부대와 경찰들이었다. 

선생이 만주(滿洲)에서 순국(殉國)할 당시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부인 임수명(任壽命) 여사는 만삭(滿朔)의 몸으로 어렵게 연명하고 있었다. 

선생의 동지들은 여사가 남편의 전사소식을 알면 낙태가 될까 염려해 일체 알리지 않고 모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선, 1924년 9월 서울로 돌아와 셋방 한 칸을 얻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중 유복녀를 출산했다. 

여사는 자녀 삼남매를 데리고 있었다. 남편이 전사했다는 흉보(凶報)와 겹쳐 둘째 아들을 병으로 여의게 되자, 갓난 딸과 함께 부군을 쫓아 음독해 자진(自盡)했다. 

임수명 여사는 1912년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할 때 일본 경찰에 쫓겨 환자를 가장하고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 선생과 1914년 결혼했다. 

그 뒤 신팔균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비밀 문서의 전달, 군자금의 모금, 독립군 후원 등을 해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부인 임수명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신팔균장군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부인 임수영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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