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충청의창] 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다수의견만이 건전한 사회통념일까? 소수의견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일까? 소수의견은 다수결을 위하여 필요한 장식품일 뿐인가? 역사를 돌아보면 다수의견이 절대적이고 불변인 것은 아니다. 소수의견이 더 정의에 부합하는 경우도 많다. 다수에 밀린 소수는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수의견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 사회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최근 법무부와 검찰청의 의견대립이나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기소의견, 심지어 국회의 운영을 보며 어느 의견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소수의 의견을 이념적 편향이라고 낙인찍는 것이야말로 반민주적이다.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약자와 소수를 존중해야 한다. 소수의견이든 다수의견이든 치밀한 논증이 없으면 설득력이 떨어질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진리 앞에서 소수의견으로 용기를 가졌던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역사 속의 이단아로 분류되어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만이 갖는 의무이자 권리인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적 사고, 창조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지동설이 근세 이전에는 소수의견이었다. 당시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다수의견이었다.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처음 발표하였다. 1600년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고 태양계와 비슷한 수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과 아울러 성서는 천문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 때문에 추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다가 교황 클레멘스 8세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캄포 디 피올리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1632년 갈릴레이는 지동설의 포기를 약속하고 사면되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을 시대정인이라 한다. 조선시대는 양반은 고귀하고 상민은 비천하다는 시대정신이 사회를 지배했다. 상민은 아무리 똑똑해도 공부를 할 수 없고 벼슬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양반인데도 어머니가 비천한 출신이었던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오죽하면 그가 도적이 되어서 사회를 뒤엎으려 했겠는가?

시대정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주류와 비주류가 생겨난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했던가? 시대정신이 확장되어 사회적 공포를 조성할 때 사회에는 일종의 ‘광기현상’이 일어난다.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상인’과 ‘비이성적이고 반사회적인 비정상인’으로 나뉘는 것이다. 광기가 만연할 때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불필요한 희생이 생기게 된다.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이나 학문적 지식을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했다. 에피스테메의 과도한 확장을 막는 일은 사회 모두의 책임이다. 특히 교육은 그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애들러가 항존주의 교육사상을 바탕으로 파이데이아 제안을 통해 공교육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까닭이다. 이 시대 우리의 교육에도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을 함께 존중하는 신파이데이아 제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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