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명 시인.
▲  정진명 시인.

낙가산 남쪽 기슭(목련공원)에서 발원하여 청주 시내로 흘러가는 냇물이 ‘월운천’라고 하는데, 동네 이름인 월오리(月午里)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月의 뜻은 ‘달’인데, 우리말의 ‘달’은 언덕이나 들판을 말합니다. 월운천의 운(雲) 자는 이 개울을 미화시키느라고 붙인 것이거나, 앞서 본 영운천처럼 ‘가람’을 뜻하는 말로 쓰인 것입니다. 월운천은 ‘달내’가 되고, 월오리는 ‘다라실, 다리실’이 됩니다. 실제로 도로명 주소에 ‘다리실’이라는 이름이 쓰였습니다.

‘실’은 ‘실개천, 실골목’ 같은 말에서 보듯이 가느다란 골짜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동네 이름에 午가 붙은 것은 매개모음이어서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달+ᄋᆞ+내’의 짜임이죠. 절 이름 중에 문의면에 월리사(月裏寺)가 있는데, 언덕 안쪽에 있는 절이라는 뜻입니다. 월리란 ‘달안’을 향찰 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솝리’를 이리(裡里)로 표기한 것과 같죠. 이리(솝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1977년 이리역 화약 창고 폭발 사건으로 이름마저 익산역으로 바뀌어 아예 우리 곁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오래 묵은 이름마저 바꾸는 것은 좀 아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과거가 지워질까요? 이름이 무슨 죄가 있는 걸까요?

미원(米院)은 보통 ‘쌀안’이라고 부르고, 쌀안축제도 합니다. 여기서 ‘쌀’은 쌀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보면 들이 좁아서 쌀이 많이 날 곳이 못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쌀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쌀’은 ‘살’을 된소리로 발음한 것입니다. ‘살’은 ‘사리다’의 어근 ‘살’입니다. 그곳에 가보면 왜 지명에 ‘사리다’라는 말이 붙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양쪽에서 흘러온 두 산줄기가 마을을 양팔로 오그리듯이 감싸 안았습니다. 그래서 ‘산줄기가 사린 안쪽의 동네’를 뜻하는 말로 ‘살안, 사리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이것을 ‘미원’이라고 잘못 번역한 것이죠.

원(院)은 옛날에 관에서 운영하던 여관이었습니다. 보통 역마와 함께 관리들이 오가는 곳에 설치한 시설이었죠. 광혜원, 요로원, 판교원, 사리원, 덕산원 같은 이름이 그런 지명입니다. 옛날에 미원에 역마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딸린 원이 있어서 붙은 이름일 것입니다. 미원의 짝말이 ‘미동’인데, 이것은 미원을 에워싼 등성이(米山)를 뜻합니다. 미동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미원의 입구를 감싸는 끄트머리입니다. 양쪽에서 흘러온 산의 팔을 오그려 붙이면 미원은 호리병 속의 아늑한 동네가 되죠.

제가 고향인 충남 아산을 떠나 청주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대학 입학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40년 전의 일입니다. 고속버스를 삼키며 창자처럼 길게 이어지는 버즘나무 싱그러운 초록 동굴 생각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새로운 지역에 든다는 것은, 그곳의 지명과 마주침을 뜻합니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하던 낯선 이름들, 예컨대 본정동, 오정목, 안덕벌, 율량동, 사직동, 사창동, 개신동, 봉명동 같은 이름은 한번 들어보면 ‘아, 그게 그 뜻이구나!’ 하고 알 만한 것들이어서 어제 입던 속옷처럼 편안하게 금세 입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생각의 한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오근장과 상당산성입니다. ‘도대체 이것들은 무슨 뜻이길래 이렇게 지어졌나?’ 하는 생각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해결된 것은 청주에 입성한 지 30년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물론, 이 지명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유명하신 분들도 이 지명의 어원에 대해 한마디씩 하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마주친 해석은 모두 민간어원설입니다. 개똥철학이라는 뜻이죠. 어원 공부는 진짜를 찾아내기 위하여 그런 민간어원설과 싸우는 피곤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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