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의 신비, 경주고분 발굴

新羅(신라)의 신비를 간직한 순금제 관식(冠飾)을 비롯하여 관대와 금동투조식이 등 찬란한 문화유물 3백점이 15일 하오 330분 발굴현장에서 선보였다.(중략)

발굴작업이 시작된 1백일만인 15일 현재 나비형 금제관식과 금은제 천 등 新羅(신라) 문화의 정수일 그 신비를 드러낸 채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46일부터 문화재관리국 경주개발발굴단(단장·金正基(김정기))에 의해 발굴되고 있는 155호 고분은 당초 높이 12.7m, 지름 47m에 달하는 거대한 구릉과 같은 봉토를 제거하기 시작, 처음으로 벨트콘베이어를 동원하는 등 치밀한 계획 하에 연인원 35백명을 동원, 28백 루베(7백트럭분) 돌과 흙을 제거했다.

15일 현재 발견된 유물은 금제 조익형(鳥翼型) 금제관식과 내관주록(內冠周綠) 금구(金具) 및 영락청동제 마탁 금제과대 및 요구(腰具) 태환(太環) 세환이식(細環耳飾) 금은팔찌 장경호 금은장도편 등 총 3백여 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금제관식은 당초 및 심엽문양이 보이는 무령왕능의 것과 다른 것이었으며 금동제투조식 이의 문양은 ()자가 연속한 것 같은 특이한 형체다.

한편 발굴조사에 참여한 지도위원은 김원용, 진홍섭, 김유선, 한병삼 재경위원, 현지위원으로는 박일훈(경주박물관장), 김재원(嶺南大), 김영하(경북대)씨 등이 위촉되었고 발굴조사단은 김정기 박사를 단장으로 하여 김동현(문화재전문위원) 7명이다. (하략) <8739·1973717일자 1>

 

1970년대 말 중학생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수학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동네 뒷동산만한, 신라왕들의 능이었다.

뭐가 저리 크게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선생님은 그 크기가 왕의 위엄을 상징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능 안으로 견학을 간다는데, 조상님들을 이렇게 욕보여도 되나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앞선 건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는 두려움이었다.

기사에 언급된 황남동 제155호분은 천마총(天馬塚)’으로 불렸다. 그 고분에서 천마도가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1973년 경주시 천마총에서 2장의 장니 천마도가 출토됐는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국보로 지정됐다.

1973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됐는데, 당시까지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거의 완형에 가까운 고분이어서 신라의 왕릉급 대형고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고분의 형식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분류된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金冠금제관모(金製冠帽금제과대(金製銙帶) 또한 1978년 각각 국보로 지정됐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그 수량도 엄청나거니와, 예술적 가치도 매우 뛰어난 것들이었다.

발굴된 유물의 수량은 장신구류 8767, 무기류 1234, 마구류 504, 용기류 226, 기타 796개 등 모두 11526개이에 달했다.

영상매체에 단골로 등장하는 금관이 여기서 발견된 것인데, 이 금관은 실용관이라기보다 의식용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의 천마는 비상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됐는데, 고구려벽화의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와 매우 유사하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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