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충주비료공장 준공

肥料(비료) 生産(생산)國內(국내) 最大規模(최대규모)第六肥料工場(6비료공장) 竣工式(준공식)26일 하오 2朴正熙(박정희) 大統領(대통령)을 비롯한 李洛善(이낙선) 商工長官(상공장관) 內外(내외) 귀빈 다수가 參席(참석)한 가운데 忠州市(충주시) 목행동 현지에서 盛大(성대)擧行(거행)됐다.

韓國綜合化學會社(한국종합화학회사)(社長(사장()선엽)美國(미국)A-D英國(영국) 바클레이 차관 37백만불과 內資(내자) 38억원 등 () 186억원을 들여 714월 기공을 본 6는 그동안 內外 기술진을 포함 332천명의 人員(인원)38천여 대의 주요장비 및 資材(자재)를 투입 2() 3個月(개월)만인 지난 7암모니아 年産(연산) 30()(日産(일산) 7백톤) 규모의 대단위 新型工場(신형공장)建設(건설)했다.

石油化學系列工場(석유화학계열공장)原料供給(원료공급) 窒素質肥料(질소질비료)需要增加(수요증가)對備(대비) 年間(연간) 32萬弗(만불)外貨節約(외화절감) 原價引下(원가인하) 輸出增大(수출증대) 기술資源確保(자원확보) 主要目的(주요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워진 6는 이때까지 建設5個 肥料工場石油化學工場과는 달리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운전이 시도되었고 試製品(시제품)生産(생산)하기까지 不過(불과) 2個月 半() 程度(정도)所要(소요)되므로 類例(유례)없는 新記錄(신기록)을 세웠다. <8826·19731027일자 1>

 

1970년대 초등학교 사회 교과목에 소개된 것 가운데 충북 괴산댐과 충주비료공장이 생각난다. 교과서에 날만 했으니 우리나라 발전에 큰 몫을 했던 것들임에 틀림없었다.

괴산댐은 산막이옛길이 있는 곳으로, 7월 집중호우로 인해 만수위를 넘겨 월류(越流)해 하류지역에 비상대피령이 내려졌던 곳이다.

충주비료공장은 우리나라 산업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기사에 나오는, 1973년 준공된 ‘6는 여섯 번째 비료공장이라는 뜻이다. 이에 앞서 1959년 설립된 충주공장(제일비료)은 영남화학(3)진해화학(4)충주신공장(6)남해화학(7)이 건립될 수 있게 한 태동지였다.

우리나라 비료공장 건립의 시초는 일제시대였다. 1930년대 초반 일제는 함경남도 흥남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한반도 최초의 화학 비료 공장인 황안공장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화학 비료 공장인 충주비료는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19614월 준공됐다. 충주비료 건설과 운영 경험을 얻은 기술진은 이후 중화학 공업 건설의 주역이 됐다.

충주시 목행동에 소재한 충주비료공장은 한국 현대화의 시발점이었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은 뒤 황폐화된 국토에 가장 필요한 것은 비료였다. 식량은 부족했고, 과일과 야채 등 먹을거리 자체가 거의 없는 절대빈곤의 시대였다. 춘궁기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다. 해결사가 비료였다. 질소비료는 식량을 증산하고 과일과 야채를 가꿀 수 있는 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충주비료공장은 1959년 건설돼 1983년 조업을 중단하기까지 215t의 암모니아와 175t의 요소를 생산·공급하며 농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24년의 역사였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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