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설 명절은 우리나라 2대 명절 중 하나이다. 새 해를 맞이하는 명절임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양력보다는 음력설을 더욱 선호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의 음력설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음력설에 고향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한다던지 혹은 음력설 기간 동안 떡을 만들어 파는 방앗간을 처벌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놀랍게도 1970년 대까지 유지되었다. 그 이전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각 기업들이 재량으로 휴무하여 음력설을 지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정보다 구정이라고 부르는 음력설이야 말로 진짜 새해를 맞이하는 명절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매년 명절 때만 되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느라 전국의 고속도로가 꽉 막힐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 명절만 되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는다. 교통체증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보통 설 명절의 유래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 488년 신라의 비처왕 때 이미 설날을 쇠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도 우리와 같은 명절이 있다. 그들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3대 절기로 지킨다. 그 중에서도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절기이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집트의 파라오와 대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이집트에 살고있는 모든 생명의 첫 소생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발라야 한다는 말씀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 문 앞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이 그 피를 보고 그 집에 이스라엘 사람이 있던 이집트 사람이 있던 상관없이 누구도 해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갈 것이다.

그날 밤 온 이집트에는 애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허풍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를 다스리는 파라오의 아들조차도 이 죽음의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파라오는 결국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떠나는 것을 허락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지킨다. 유월절이 되면 그들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다. 식사를 할 때 가족의 어른은 어린아이 하나를 택하여 질문을 하게 한다. 그럼 지목된 아이는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럼 아이를 지목한 어른은 자신이 어렸을 적 부모에게 배운 그대로 자녀들에게 설명해 준다. 이런 풍습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이스라엘이 가장 큰 절기로 생각하는 이 유월절의 특징이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유월절 날 그들이 먹는 무교병과 쓴 나물은 당시 조상들이 겪었던 급박한 상황과 고난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절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현재의 삶이 과거 조상들의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결과임을 늘 기억하기 위한 날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명절은 단지 즐겁고 행복한 일만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고 힘들었던 과거 경험들을 매년 반복하여 상기하는 날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런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고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발견하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과거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는 것이 결코 마음 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과거의 기억은 참으로 가슴 아픈 기억임에 틀림이 없을지 모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러한 가치를 가진 기억들이 있다.

생각할수록 마음 아프지만 그 아픈 기억을 통해서 더욱 앞으로 나아갈 힘과 새로운 방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픔이 단지 상대를 원망하기 위한 이유와 원인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나를 준비시키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를 넘어서지 못하면 같은 과거는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과거의 아픔을 그저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과거의 아픔은 오히려 나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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