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성경은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총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이지 수만 해도 10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그러다보니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에게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장면이 있다. 성경의 핵심만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예수의 대답은 곧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율법사의 질문에 이와 같이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 말을 요약하면 이와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예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결국 성경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부활한 후 하늘로 올라간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올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이 나는 성경의 기나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 혼자만 있는 세상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 역시 다른 사람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둘 이상의 공동체를 전체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사랑의 핵심이 ‘존재’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존재의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로지 관계의 개념을 통해서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성경은 인간 존재의 문제보다 인간 관계의 문제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가?

그것은 존재의 문제 자체도 관계의 문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제시한 명제로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개념은 인간이 얼마나 존재의 문제에 집중해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철학적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이를 위해 많은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자기 존재의 증명은 이와 같은 철학적 사유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 존재는 나의 존재 자체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나에 대한 그들의 기억과 증언은 곧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있다.

오늘날 고독사가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 고독사는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죽음을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다 사는 동안 누구도 그의 존재를 기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기록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존재를 통해서 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관계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존재와 관계 중에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더욱 중요한 관계의 문제는 등한시 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삶의 핵심은 존재가 아닌 관계에 있다. 내가 바라는 행복, 기쁨, 평안, 풍요의 문제가 존재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 무엇보다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사랑’에 집중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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