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환 한국자산관리공사 대외협력위원

 

[황종환 한국자산관리공사 대외협력위원] 이제 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 듯하다. 겨울 끝자락 즈음 봄의 길목에 서면 유난히 동백꽃이 눈에 아른거린다. 작년 겨울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선배가 저술한 동백이야기라는 책을 받는 순간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붉은 동백꽃 꽃말은 기다림과 애타는 사랑의 의미라고 한다. 오래전에 동백섬과 오동도 군락지에서 보았던 동백나무 낙화가 전설이 되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이른 아침 거실 창문을 활짝 열고 동백꽃만큼이나 붉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일은 가슴 벅찬 즐거움이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뜨거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봄의 햇살은 겨울 내내 움츠러졌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만물을 소생시킨다. 그래서 봄은 희망이며 용기의 상징이다. 대자연의 품안에서 생명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은 감사의 대상이며 축복이다.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난 많은 인연들이 있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거나 선하고 악하거나 찰나적이거나 영원한 만남이 있을 것이다. 가끔 선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의 삶과 소식이 궁금하다. 그럴 때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을 일일이 넘기며 종종 추억한다. 한때는 연락처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적이 있다. 사람을 많이 알면 알수록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에 지치고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위로받으며 가슴 속 깊이 간직한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 막상 떠오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정작 마땅한 사람을 떠올리며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 인연은 하늘이 내려주지만 다음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말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 해외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10여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삿짐이 무려 트럭 다섯 분량이나 된다는 하소연이다. 당장 쓰지 않는 물건이지만 나중에 귀국하면 어떨지 몰라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뭐라고 딱히 해줄 말이 없어 일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물건은 앞으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대신하였다. 대부분 집안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물건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필요하지 않으면서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 경험에 비춰보면 한번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몇 해가 지나도록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요즘 가끔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신상품을 구입하듯 정작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 빠르게 변하는데 자신의 잘못된 습관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쓸데없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삶의 무거운 짐을 버릴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다소 지금은 아쉬울지라도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진정 소중한 것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진 풍파와 추위를 이겨내고 사시사철 푸른 잎 사이로 오롯이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처럼 자신을 완전하게 버림으로써 원하는 소중한 것을 여유로운 공간에 채울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소중한 것처럼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순간 비로소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 떠나는지 알지 못해도 가다보면 어디에선가 누구라도 만날 수밖에 없다. 가는 도중에 우연하게 만나 기쁘거나 슬픈 사연을 함께 나누며 웃기도 울기도 하지만 갈림길에 들어서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사랑하며 용서하기에도 부족한 짧은 시간에 하찮은 자존심으로 주변을 힘들게 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다. 한겨울 추위에도 불타는 듯 열정적으로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의 낙화를 통해 진정 버리면 비로소 채워진다는 사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싶은 봄날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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