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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후백제를 세운 견 훤(甄萱·867∼938)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이다. 따라서 견 훤(甄萱)을 시조로 삼는 상주견씨(尙州甄氏)와는 같은 계통이다. 아자개는 본래 이씨(李氏)였는데 후에 견씨(甄氏)로 성을 고쳤다. 아자개는 신라 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에 웅거하며 세력을 떨쳤던 호족이었다. 아들 견 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아자개의 5형제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견 훤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면서 견 훤을 숲 아래 두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그에게 젖을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규
2013.03.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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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씨(鮮于氏)의 기원은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 때 동래(東來)하여 기자조선을 세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조선은 기자의 큰 아들 기송(箕松)이 장혜왕이 되면서 왕통을 잇는다. 둘째 아들 기중(箕仲)은 우산국을 세운다. 그 뒤 조선의 선(鮮)과 우산국의 우(于)를 합하여 선우(鮮于)라는 성(姓)을 삼는다. 그리고 기자가 식읍으로 하사받은 태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태원(太原)은 충청북도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충주(忠州)의 옛 지명 혹은 중국 산서성에 위치한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곳이 맞는지 정확하지 않다. 기자조선의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규
2013.03.0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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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평우성(平友聖)은 조선 선조 때의 사람으로만 전해올 뿐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다만 그의 묘가 인천광역시 남구 서창동 앞산에 있다. 한편 서기 931년(고려 태조 14) 평환(平喚)이 강덕진두(康德鎭頭)를 지냈다는 기록이 조선씨족통보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평씨(平氏)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평씨는 원래 중국 성씨이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평당(平當)이 식읍명(食邑名) 평릉(平陵)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충주, 선평, 인천, 에산, 가흥(진도의 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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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3.02.2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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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최승(崔陞)은 본래 당나라 장군이다. 846년(신라 문성왕 8년) 신라에 기근이 들어 도둑 무리가 창궐하자 당나라 무종의 명으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토평하였다. 그 뒤 889년(진성여왕 3년)에는 신라에서 원종(元宗), 애노(哀奴)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여 은자광록대부에 올랐다. 그 후 예성(충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양정공파, 전서공파, 총제공파는 그들의 7대조인 최공의를 1세조로 하고 한림공파는 최 고를 1세조로 한다. 최공의의 손자 최 옥(崔沃)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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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3.02.1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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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지 경(池鏡, 903∼1003)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태학사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 그 뒤 6세손인 지종해(池宗海)가 충주에 살았으며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충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로부터 16세까지 모두 11대 36평장사를 내었다. 고려 말 지용기, 지용수, 지용도 등은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된 이후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지석영(1855~1934)은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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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3.01.3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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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 관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1930년대에 황해도 벽성군 일원에, 그리고 평북 구성군 사기면 송백동, 평남 성천군 사가면 지석리, 함북 무산군 삼장면 삼상동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과거 급제자는 이사규(李士珪, 1583 癸未生) : 문과(文科) 광해군2년(1610) 별시 병과(丙科), 이경익(李景益, 1583 癸未生) : 문과(文科) 선조32년(1599) 정시 을과(乙科), 이관해(李觀海,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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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3.01.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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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어중익(魚重翼)은 고려 태조 때 벼슬이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기묘보(己卯譜)'세록(世錄)편에 보면 그의 본성(本姓)은 지(池)씨였는데 어(魚)씨로 바뀐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 꿈에 큰못 속에서 청의소년(靑衣少年)이 나와 하는 말이, 뒤에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인데 몸에 길상(吉祥)스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잉어로 변하여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큰 비늘 셋이 있어 그 광채가 사람을 압도했다. 그 아들이 뒤에 고려 개국의 원훈(元勳)이 되었는데 태조가 이를 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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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3.01.1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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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의종 때 무신정권의 서경낭장을 지냈다. 명종 6년 두경승과 함께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 상장군에 오르고 충주부원군에 봉해진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석씨는 판윤공 석수명(石壽明) 대에 와서 홍주로 분관하였고, 문하주서공 석여명(石汝明)은 충주로 분관, 동원(同源)이면서 각각 다른 관향을 갖게 되었다. 그 뒤'경인보(庚寅譜)'수보(修譜) 때에 대동보(大同譜)로 합보(合譜)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충주-홍주석씨로 부른다. 석씨가 가문의 세력을 키운 것은 7세조인 석천을(石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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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3.01.0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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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박영(朴瑛)은 신라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 박언창(사벌대군)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을 지냈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점령하여 진흥왕 때 소경(작은 서울)으로 하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조의 명재상 박순은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시와 서예도 뛰어났다. 정승의 자리를 14년간이나 지낸 그는 당시 영의정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두 차례나 올려 끝내 그를 제거한다. 선조 원년 대제학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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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2.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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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시조 김남길(金南吉)은 고려 충숙왕 때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태자대부를 지낸 뒤 충원군(충주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선계(先系)는 신라 경순왕으로 경주군(慶州君) 김명종이 16대조가 되며 충숙왕 때 병부시랑을 지낸 김정윤의 아들이다. 시조 김남길의 둘째 아들 김양한은 평북 벽동으로, 셋째 김양희는 평북 의주로 옮겨 살면서 후손들이 관서북 지방에 많이 살게 되었다. 시조의 현손 (손자의 손자) 김도민은 세조 때 이조참의에 올라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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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2.1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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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김대유(金大猷)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인 김순웅의 12세손이다. 김대유가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청성(淸城,청풍의 별호)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청풍으로 하였다. 본관 청풍은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의 지명이다. 시조의 묘소는 충북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 있다.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 김 식은 청풍김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당시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들이 정치개혁을 외치며 훈구파의 대신들과 대립하던 무렵이다. 그는 조광조. 김안로 등과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애썼던'기묘명현(己卯名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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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2.0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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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는 그 출발점을 기원전 115년 당시의 기자조선으로 한다. 기자조선 마지막 왕인 41대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금마(전북 익산시)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했다. 그 뒤 8대 원왕의 세 아들가운데 우평은 북원선우씨(北原鮮于氏), 우성은 행주기씨(幸州奇氏), 우량은 청주한씨가 된다. 우량의 31세손인 한지원의 네 아들 중 한 란(韓蘭)이 바로 청주한씨의 중시조다. 한 란은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에 공을 세웠다. 한상질은 태조의 진문사로 명나라에 들어가'조선'이란 국호를 받아 온 인물이다. 그는 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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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1.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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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최 단(崔鄲)은 고려 예종 때 문과에 올라 우정언(右正言), 좌사간 기거서인(左司諫 起居舍人), 서해도안찰사를 지냈다. 인종 때의 권신인 이자겸을 탄핵하다가 고성으로 유배 된다. 그 후 복관되어 이부시랑에 이르렀고 서원(西原,현 청주)군에 봉해졌다.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고려 때 병부상서 최응청(崔應淸), 판문하사(判門下事) 최신우(崔信友), 조선시대 좌찬성 최사근(崔思謹), 첨절제사 최만선(崔萬善) 등이 있다. 항렬자는 24世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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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1.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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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정극경(鄭克卿)은 고려 의종 때에 중랑장을 지냈다. 그 뒤 정극경의 6세손 정 책이 고려 충숙왕 때 충주 목사를 역임하고 통헌대부, 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다. 청하는 청주의 옛 지명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정 탁(鄭擢·1526∼1605)은 조선 개국 일등 공신으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다.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인 대사헌 정 탁(鄭琢)은 명종 때 문과에 올라 선조 때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으로'명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에도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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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1.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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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좌형소(左亨蘇)는 원나라 천관시랑(天官侍郞)으로 고려 말기에 탐라(제주도) 목마장(牧馬場)의 감목관(監牧官)으로 부임하여 정착했다. 이에 앞서 좌씨는 중국 노나라 때의 태사 좌구명(左丘明)에서 비롯된다. 그는 유명한 춘추좌씨전을 주석한 학자다. 후배인 공자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좌형소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사람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며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동성 청주(靑州)를 본관으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후손들은 중국의 청주(靑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1922년 조선 호적령이 내려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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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1.0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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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능희(李能希)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에 올랐다. 그의 선계(先系)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주이씨 족보에 보면 태사공 이능희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했다고 한다. 이능희의 아들 이겸의도 삼한공신이 되었으며 중손 이중강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고려 초 이중강의 손자 이공승은 인종 때 문과에 급제, 우정언을 지냈다. 1148년(의종 2년)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여러 관직을 지냈다. 1173년(영종 3년) 이의방이 문신들을 학살할 때 문생 문극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이공승의 아들 이춘노는 참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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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1.0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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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양 기(楊起)는 중국 원나라 사람이다.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우리나라에 온 뒤 정착했다. 그 후 상당백에 봉해지고 청주를 본관으로 하사받는다. 상당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시조 양 기(起)의 아들 양지수는 광정대부에 올라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손자 양백연은 동강도지휘사와 서강부원수로서 왜구를 격퇴한 뒤 찬성사가 되어 정방제조를 겸했다. 증손 양영수는 밀직부사와 상장군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단종 선위 때 시조의 현손(玄孫) 혜빈양씨(惠嬪楊氏)는 이 사건에 연루돼 참형되고 그 일족은 팔도로 흩어지는 비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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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0.2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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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손 순(孫順)이다. 그의 25세손 손필영(孫弼榮)은 고려 원종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른 손 찬(손순의 19세손)의 6세손 손덕기(孫德基)의 아들로 전한다. 손필영은 고려시대에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음성지방에 살면서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손필영(孫弼榮)이 1세조이다. 손필영의 아들 손 취는 고려 때 영녕군에 봉해졌고, 손자 손 희는 자헌대부로 서북면 도순문사를 역임했다. 손 희의 맏아들 손원렬은 찬성사를 거쳐 우문관 대제학을 지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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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10.0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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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김씨(淸州金氏)는 시조가 다른 3계통이 있다. 첫째 계통의 시조 김 정(金錠)은 신라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이다. 청주를 본관으로 삼은 것은 고려 때 금오위대장에 오른 10세손 김 보(金甫)가 상락군에 봉해져 청주의 구봉산에 은거했기 때문이다. 상락은 청주의 다른 이름이다. 김 보의 큰 아들 김 예는 함경도 북청에 들어간 후 후손들이 그곳에 살았다. 둘째 아들 김 전은 고려조에서 병부상서를 지냈다. 김 전의 손자 김 린은 조선 태종 때 우찬성을 거쳐 장흥부사를 지낸 뒤 그곳에 정착, 후손들의 텃밭이 된다. 둘째 계통의 시조는 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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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9.1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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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곽 원(郭元)의 선조는 신라 헌강왕(제49대왕,재위기간:875-886) 때 시중을 역임한 곽 상(郭祥)이다. 그는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방의 석학인 최치원과 교분을 나누었다. 후손인 곽 원(郭元·시호는 문성)은 고려 성종 때 등과해 형부상서를 역임했다. 곽 원의 10세 후손인 곽연준(郭延俊, 시호 충헌)은 개성부윤 등을 역임하고 청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청주에 살면서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곽 원은 996년(고려 성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 때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형부시랑과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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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8.30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