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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 캠퍼스는 맑은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쁘장한 패널로 시전(詩展)을 열고 있는 후배들을 보니 참 흐뭇하다. 10여 년 만에 대학에 찾아온 듯싶다.지난 15일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 앞에서 창문학동인회(窓文學同人會)의 ‘낙엽제’가 있었다. 낙엽제는 창문학동인회 충북대에 재학 중인 현 동인들이 가을에 여는 시전이다. 오랜만에 창문학 후배 동인들의 시를 본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40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선후배 명예동인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설렘이었다. 종교와도 같았던 문학충북대학교 창문학동인회는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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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11.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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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미 대통령이 하야한 건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 때문이었다.1972년부터 1974년까지 2년 동안 일어난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침입과 도청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닉슨 하야의 스모킹건이 됐던 건 불법 침입과 도청 자체가 아닌, 이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이를 감추기 위해 미국 행정부는 조직적으로 권력을 남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탄핵안 가결이 확실시되자 닉슨은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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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11.0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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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사고’를 쳤다.당시엔 문학집을 팔려고 대학가를 기웃대던 상인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의 입담이 얼마나 셌는지 웬만한 학생들은 홀라당 넘어가기 일쑤였다. 나도 그런 ‘어리숙한’ 학생 중 하나여서, 덜컥 ‘제3세대 문학’을 샀는데, 모두 24권이었다.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마 10만원 안팎이었던 것 같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43만원이었으니 나로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금이었는데, 그네들의 말빨에 속수무책 당한 격. 어쨌든 그거 갚느라 일당 8000원짜리 막노동판을 다녀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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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10.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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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과 함께 목도한 전투기 ‘월북 사건’이 떠오른다.1987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대본부엔 대대에서 시찰나온 소령 계급의 작전관과 중대장, 그리고 서무병인 내가 있었다.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중대본부 뒤에 있는 천불산 쪽에서 비행기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런데 쉬쉬쉬~ 나던 소리가 갑자기 쐐애액~ 굉음으로 바뀌었다. 우리 전투기 두 대였다. 순식간에 옛 GOP였던 천불산을 넘어 중대본부 바로 앞에 있는 철책선까지 가로지른 비행기는 눈깜짝할 사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넋이 나간 작전관이 말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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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10.0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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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당신 삶의 앞을 예감하셨던 것일까.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한 윗마을 효자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만큼은 꼭 아들이 보는 앞에서 세상을 뜨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그러나 끝내 그러지 못했다.와수리까지 오토바이를 태워 보내면서 중대장이 한 말이 기억난다.“누구보다 난 김 상병 깊은 심지를 믿어. 세상에 어머니 돌아가신 것만큼 슬픈 일이 있겠는가만, 슬프면 그 슬픔 그대로 받아들여. 그리고 자넨 그 슬픔을 딛고 설 거야.”다정다감하면서도 원리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던 ‘FM 중대장’은 김용현 대위였다. 곁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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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9.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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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첫 번째 군대 이야기고, 두 번째 축구 이야기라고들 한다. 이보다 더 싫어하는 이야기는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라 하는데, 이것이 설문조사 결과인지, 신빙성은 어느 정도 있는지 알 수는 없다.여자들이 첫 번째로 싫어한다는, 군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세상의 반’이 싫어하더라도 남자들이 굳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건, 그 곳엔 그들의 청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군대 뭐 같다’고 하고,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하면서 입대 하자마자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대한민국 청춘들의 마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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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9.0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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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영화감독이 2006년에 개봉한 ‘한반도’가 요즘 생각난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남북이 통일을 약속하고 그 첫 상징인 경의선 철도 완전 개통식을 추진하는데,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개통식을 방해하고 한반도로 유입된 모든 기술과 자본을 철수하겠다며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한다. 그런데 그 조약에 찍힌 국새가 가짜라는 것이고, 진짜 국새를 찾으면 조약 자체를 뒤엎을 수 있다는 것이 궁지에 몰린 우리 정부의 타개책이다.두 가지 뜨악한 장면이 있었다.1907년 조약은 대한제국과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조약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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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8.2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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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낸 친구들과 뒷동산 너머 으슥한 소롱골로 갔다. 칡넝쿨 우거지고 잡초만 무성한 소롱골은 웬만해선 어른들이 오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4홉들이 소줏병을 들고 녀석들에게 물어봤다.“너희들 술 먹어 봤니?”“얌마, 그건 초등학교 2학년이면 떼는 거여.”녀석들은 논으로 들로 나가 일을 하는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하며 몇 모금씩 먹어본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했다.그러고 보니 나만 술을 마셔보지 못했던 것.“술 마셔보니 어떤데?”“그거, 기분 끝내준다.” “이게 꿈이니, 생시니?”녀석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지금도 두어 잔에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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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8.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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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청춘을 오롯이 바쳐 살미와 연풍천주교회 공소회장을 지낸 아버지께서 농사를 짓겠다며 연풍에서도 더 산 속 깊숙한 오지, 종산이란 동네로 들어간 건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공소회장 몫으로 나오는 월급이란 게 쥐꼬리만한 것이어서, 그것으로 딸린 여섯 식구들 먹여살리기엔 턱도 없었고, 내실에 있는 몇 백평 땅에서 나오는 소출 또한 고만고만한 것이어서 우리 집안은 늘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했다.더욱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아버지께서 가은에 있는 광산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해버린 터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버진 결국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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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7.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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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시 딜리 플라자 인근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집권 3년차로, 재선 출마를 1년 앞두고 있었던 존 F. 케네디 35대 미국 대통령은 당시 부통령 린든 B. 존슨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이 지역에 유세 차 왔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전 세계를 관통한 이 총성은, 그리고 세계 역사를 바꾸어 버렸다.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와 함께 에어 포스 원을 타고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에 도착한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준비된 링컨 컨티넨탈 차량을 타고 딜리 플라자 인근으로 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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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7.1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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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처음 언급한 건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였지만, 이를 유명한 말로 만든 건 영국의 윈스턴 처칠 전시내각 총리였다.처칠은 1946년 3월 5일 미국의 미주리 주 풀턴에서 연설을 통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그는 “(공산국가들이) 발트 해의 슈체친으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이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중국이 1949년 이와 비슷한 고립 정책을 채택했을 때 중국과 소련의 정책을 구별하기 위해 ‘죽의 장막(Bamboo Cur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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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6.3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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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아이가 ‘SOS’를 보내왔다. 3000만원이 더 필요한데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올 4월 개점한 업장의 인테리어 비용이 지출 예상 금액을 훌쩍 뛰어넘어 부득이 자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이미 신용보증으로 3000만원을 대출 받았던 터였기에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그 과정이 까다롭고 복잡하다. 또 제출해야 할 서류는 왜 그리 많은지.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 소득금액증명원, 전입세대열람내역, 국세·지방세납세증명서 등등. 주택 공동소유자인 아내까지 합치면 13개나 됐다. 문제는 주민등록상 동일 거주 자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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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6.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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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그 친구는 유튜버로서 강한 팬덤층을 형성하고 있다.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도 매우 많고 다양하다. 스픽스, 매불쇼, 장윤선의 정치편의점 등등. 이곳저곳 틀면 나온다. 여기서 그는 ‘달마대사’로 통한다. 세상의 이치에 해박하고, 어찌보면 달관한 듯한 그의 모습과 엇비슷하다. 걸쭉한 입담은 시청자들을 빨아들인다.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강점 중의 하나다.유튜브와 유튜버가 대세인 지금, 그는 말 그대로 잘나가고 있다.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서 유튜브는 세상살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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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6.0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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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청주에 올 때 이따금 술자리를 갖곤 했다. 나라 돌아가고 있는 위태로움에 대해 술자리에서 쏟아내는 그의 달변은 언제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끝엔 정의당에 대한 애정과 쓸쓸함이 있었다.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의당과 인연을 맺은 내 친구 김종대는 늘 자신을 ‘구국의 강철 이빨’이라 칭했다. 나라 생각하는 논리에선 누구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일 터인데, 그런 그에게도 이번 22대 총선에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녹색정의당은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었을 터였다.차라리 갈아타는 게 어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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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5.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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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4·19 혁명 64주년을 맞아 국립4·19민주묘지를 참배했다. 당연한 이 행사가 논란을 일으킨 건 야당 대표 등이 대거 참석하는 기념식에 앞선 ‘조조참배’였다는 점이었다.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오전 8시께 4·19기념탑에서 헌화·분향하고 묵념을 올렸다. 이날 오전 10시에는 한덕수 국무총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등이 참석하는 4·19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윤 대통령은 본행사인 기념식엔 빠졌던 것이다.윤 대통령은 지난 2년 동안 4·19 혁명 기념식에 빠지지 않았다. 2022년 4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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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4.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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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의 톺아보기] 김명기 충청일보 편집인·논설위원이번 총선처럼 말이 말을 낳고, 또 그 말이 말을 낳는 ‘언어의 홍수’에 휩쓸린 적이 있었나 싶다. 가슴을 울리는 명연설이 더러 있는 것 같고, 귀에 쏙쏙 박히는 효능감 있는 연설도 간혹 있는 것 같다. 이와 반대로 또 어떤 연설은 허접스럽기 이를 데 없는데다, 듣기에도 민망한 것으로 보인다.말은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마디가 설화(舌禍)가 돼 스스로를 위협하기도 한다.그래서 말은 칼과 같다. 사람을 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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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2024.04.0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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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겐 외람되지만, 나도 세상을 좀 살았구나 싶다.어린 시절,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험, 헛기침하는 ‘노인분’들의 나이는 대체로 예순을 넘기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 시절, 동네 노인분들 중에 장수하시는 분들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그런 말을 했다.“저 양반은 벌써 환갑 진갑 다 지냈어.”그런데 어느덧 내가 내년이면 환갑(還甲)이고, 후년이면 진갑(進甲)이다. 참 세월이 빠르다. 올해 나이 이순(耳順)인데, 나는 ‘듣는 대로 이해 할 수 있게 된 나이’일까. “그 사람, 명절 때 갈 곳이 없잖아”며칠 전 큰누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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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3.2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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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입학선물을 해준 건 큰매형이었다. 큰매형은 맞춤교복에 에센스 영한사전을 큰돈을 들여 장만해 줬다. 그리고 무심한 듯 툭, 한 마디 던졌다.“공부 열심히 하고, 또 어디 가서 빠져보이지 말고.”촌동네에선 입학이니 졸업이니 하는 ‘의례적인 행사’에 뒤따라야 할 ‘의례적인 선물’이 매우 드물었다. 서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시절이었으니. 그래서 큰매형이 건넨 ‘뜻밖의 선물’은 ‘기쁨 두배’였다.에센스 영한사전은 앞 몇 장만 까맣게 때를 탓을 뿐, 뒷장은 깨끗했다. 큰매형의 바람과 달리, 별로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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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3.1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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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의 톺아보기] 김명기 충청일보 편집인·논설위원 '지는 게 어렵다'며 세계 바둑계를 주름잡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세돌의 가장 극적인 서사는 AI(인공지능)와의 대결이었다. 2016년 3월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이세돌은 완패했다. 바둑계의 예측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만큼 AI는 완벽에 가까웠다. 오히려 네 번째 대국에서 거둔 이세돌의 승리가 길이 남을 역사로 기록됐다. 바둑 관계자들은 현재 AI에 대적할 만한 프로기사들의 치수는 두 점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과학사(史) 속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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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2024.02.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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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친구 규동이의 마지막 모습을 본 건 4년 전 총선이 한창 치러지고 있던 때였다.그때 동네 친구 다섯이 모여 제천 의림지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폐암이 재발된 규동이는 치료를 거부하고 있던 터였다.“이러나 저러나 가는 건 순서 차이일 뿐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먼저 가서 기다릴게.”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살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덧붙여 동창들이 십시일반 모은 700만원 정도를 건넸다.한사코 거절하던 규동이는 결국 그 돈을 받고는 울었다.그날, 제천서 청주로 오는 길 내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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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기자
2024.01.28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