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남부얼음' 사장 구연수씨가 배달할 얼음을 자르고 있다. 여름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가족·친구들과 아이스박스에 시원한 얼음을 싣고 강·바다로 달려간다. 하지만 휴가철이 되면 얼음을 자르느라 분주한 사람이 있다.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남부얼음' 사장 구연수씨(56)는 38년동안 청주시내 곳곳에 얼음을 배달하며 살아온 얼음업계 '대부'다.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청주로 나온 구씨는 콩나물 배달을 하다가 자전거에 얼음을 싣고 가는 모습을 보고 신기한 나머지 얼음공장에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홍수환 선수가 세계챔피언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물리치고 챔피언 벨트를 따낸 뒤 외친 유명한 한마디다.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때 권투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줬고 고된 일상을 이겨낼 수 있게 한 활력소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권투계는 1970~80년대의 화려한 영광을 뒤로 한 채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세계챔피언 한 명을 배출하기도 버거운게 현실이다.최병천 권투체육관 관원들이 훈련을 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도 내리막 길로 접어든 권투의 부활을 꿈꾸며 세계챔피언 발굴을 위해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오락 게임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인 철권. / 충청일보개인용 pc의 대중화가 이뤄지고 pc방이 생기면서 요즘은 대형오락실 몇몇을 빼놓고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오락실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게임산업이 발전하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사라져가는 곳이 바로 오락실이다. 오락실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요 놀이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대 초반부터다. '벽돌깨기'와 '스페이스 인베이더'에 이어 오락실 확산에 기여한 대표적 게임은 '갤러그'였다. 비행기를 좌우로 움직이며 적을 격추시
고향 청주서 부르는 '노래사랑'"염주 한알 생에 번뇌 염주 두알 사에 번뇌, 백팔염주 마디마다 님의 모습 담겼으니,낭랑한 목탁소리 님에게 드리울 제 풍경소리 허공에 울려 퍼지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장발에 나팔바지를 입고 다녔던 1970~80년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한 노래다. 지난 1978년 대학가요제 입상곡 '백팔번뇌'라면 그때 그 시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최현군'하면 요즘 세대들은 모르지만 당시 대부분의 노래가 사랑·이별을 주제로 하던 때 충북 청원군 부강이 고향인 최현군씨(52)가
'타탁탁 타탁탁' 작은 쇠망치로 톱날을 펴는 소리. '스르륵, 스르륵' 톱니 하나하나를 줄로 가는 소리. 청주 육거리시장 한켠에 허름한 점포 안에는 쇠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하다.날이 닳아 약해졌던 톱은 날카롭게 변하며 이내 제 힘을 되찾는다. 그리곤 나무토막 하나를 보란듯이 단번에 베어 낸다.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에서 왔다는 손님 장성열씨(75)는 만족스런운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나선다.육거리 시장에서 '북일 톱집'을 운영하는 나중찬씨(71·사진)는 35년째 톱을 만들고 헌 톱의 날을 세워 새톱으로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나
"찹쌀떡 사려어~찹쌀떡, 메밀묵~." 지난 1일 밤 11시40분쯤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주택가에 지난 1970~80년대에나 들었음직한 그리운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찹살떡 10개들이 한 묶음을 팔고 있는 라경학씨(42·사진)는 밤만 되면 어김없이 주택가와 아파트를 구석구석 누비며 '추억'을 팔고 있다. 한겨울 깊은 밤 출출할 때 찹쌀떡 장수나 메밀묵 장수들의 그 아련한 외침 소리를 그리워하는 서민들에겐 더 없이 반가운 소리이다.라씨는 "한 묶음에 5000원, 두 묶음에는 1만원 하는 식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팔고 있지만 하
"힘으로 쇠를 달구고, 두드려 연장 만드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겠어. 쇠와 불이 하나가 돼야 진정한 대장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화덕에서 금방 꺼내 시뻘겋게 달아 오른 쇠를 바라보는 최용진씨(61·대장간 부문 고유 기능 전승자)의 눈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한증막' 더위 속에 이마에서 연신 흘러 내리는 땀방울도 아랑곳하지 않고 망치로 쇠를 두드린 뒤 화덕에 넣었다 빼기를 수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최씨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서 40여년간 '쇠붙이·화덕'과 함께하는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괴산군 청천면에
'뻥' 소리에 30년 추억 '솔솔'뻥이요 뻥먹을 것이 흔치 않던 때 골목에서 뻥튀기 아저씨 소리가 들리면 어디선가 모인 동네 아이들이 귀를 막고 한걸음씩 뒤로 물러선다.'뻥'소리와 함께 부풀려져 나온 뻥튀기만 봐도 마음이 절로 풍성해지던 시절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성해지고 간식거리도 서구화되면서 뻥튀기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청주 상당구 우암동에서 뻥튀기 가게를 운영하는 뻥튀기 장수 30년 경력의 유정희씨(63).괴산이 고향인 유씨는30대에 증평으로 건너와 뻥튀기 기계를 싸게 판다는 선배의 소개로 뻥튀기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며
-청주 육거리 시장 내 청송혼수"솜이불에는 따스함 이상의 그 무엇이 있습니다. 시집보낼 딸 아이의 행복을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이불을 지으시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포근한 목화솜 이불 한 채로 온가족이 따뜻한 겨울을 나던 때가 있었다. 요즘같이 쌀쌀한 가을이면 추운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동네 아낙들은 여름 내 장롱 속에 넣어둔 두꺼운 솜이불을 들고 솜틀집을 향했다. 그러나 주거환경의 변화와 가볍고 관리하기 쉬운 화학솜의 등장
-청주 상당구 북문로2가 대림라사 정장 한 벌을 완성하기 위해 8000번 이상의 바느질이 필요합니다. 맞춤양복은 단순한 옷이 아닌 하나의 작품입니다수년 전부터 기성복에 떠밀려 설자리조차 없는 수제 양복점은 이제 소수의 특수 체형 젊은이만이 거의 유일한 고객이다. 청주 상당구 북문로2가에서 23년동안 한 자리에서 '대림라사'라는 간판을 걸고 바느질을 해 온 강충열씨(55).25살 되던 해 군대를 막 제대한 강씨는 무작정 돈을 벌기 위해 당시 양복점을 운영하던 작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양복점 일을 배웠다&
헌책 고古자료로 건네줄때 뿌듯헌책방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사라져가는 역사를 보존하는 곳입니다.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누렇게 빛 바랜 오래된 책들이 책꽂이에 한가득 꽂힌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던 헌책방은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보물상자였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의 발달과 대형서점의 등장으로 헌책방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청주 성안길에서 36년을 헌책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40여㎡의 조그마한 '보문서점'를 운영하는 이보형씨(63).청원순 오창읍 여천리가 고향인 이씨는 한학을 하던 부친의 영향으
목욕탕에서 마음까지 씻을 수 있었으면...목욕탕에 오는 손님들이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세심탕'(洗心湯)이었으면 합니다.수년 전부터 시민들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종 편의 시설들이 대형화되고 있는 가운데 동네 목욕탕들은 대형 찜질방과의 경쟁에서 밀리며 생존을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청주에서 56년이라는 시간동안 한 자리에서 '제일 목욕탕'을 운영하는 박학래씨(86).박씨는 현재 청주 시내에 3곳의 목욕탕과 1곳의 대형 찜질방을 운영하고 있다.박씨와 목욕탕과의 인연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어진다.15살
세월이 흐르면 사람 사는 방식도 바뀐다. 기계도 기존의 아날로그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디지털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사람 사는 건 기계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삶 하나하나에 정(情)이 배있고, 그 사람의 인생이 묻어있다. 우리가 살면서 편한 디지털에만 마음 뺏기지 않고 간혹 훈훈하고 사람 사는 냄새 나는 아날로그에 아련한 미련을 갖는 이유 중 하나다. 한 때 산업화 시대를 지나 고속성장 시기를 거쳐 우리 주변에 새로 생긴 직종도 많고, 반대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업종도 많다. 하지만 아직 곳곳에 우리의 지난날을 아스라이 기억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