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采浩·1880년 11월 7일~1936년 2월 21일)

 

한(韓)나라 생각/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 줄 줄 흘러 내려오리니/ 한 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韓)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 1910년 압록강을 건널 때 선생이 읊은 시 -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현 대전 중구 어남동)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1887년 조부의 고향(본적)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했다.

마을 서당 훈장인 할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배웠다.

▲ 청주 상당구 낭성면에 있는신채호사당.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했다가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만민공동회 운동 때에는 간부급으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해 그 해 연말에 독립협회가 해산 당할 때 일시 투옥됐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향리에 돌아와 문동학원(文東學院) 등에서 신교육에 종사했다.

1904년에는 신규식(申圭植) 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의 이웃에 산동학당이라는 신식학교를 설립했다. 

1905년에 장지연(張志淵)의 요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활동했다.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으로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 신문에서 자유롭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성력을 다할 것을 계몽했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해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했다.

▲ 청주예술의전당 신채호동상.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해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십세기 신국민(二十世紀 新國民)'은 신민회의 이념을 국민에게 잘 천명한 대표적 논설이었다.

그 밖에도 합법단체로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에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했으며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에도 다수의 애국계몽논설들을 발표했다. 

또 주시경(周時經)과 함께 국문 전용의 여성잡지인 '가영잡지'의 편집인이 돼 부인층의 계몽에도 노력했다. 애국계몽운동기의 '독사신론'(1908), '을지문덕(乙支文德)'(1908),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1909),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1910, 실전) 등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하는 저서들을 저술, 근대민족사학을 수립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1910년 4월에 신민회가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을 위해 간부 일부를 망명시키게 되자 그 일단이 돼 국외로 망명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1911년 12월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在亨) 정재관(鄭在寬) 등이 중심이 돼 교민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게 되자 그 주필로 활동했다. 권업신문을 통해 노령과 만주의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문필활동을 했다. 

1912년 윤세복(尹世復)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등과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14년에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朝鮮史)'를 저술했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해 선생의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북경에 이주해 국사연구와 문필활동에 종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했다.

▲ 1928년 여순감옥에 투옥된 신채호선생

그러나 이 회의에서 성립된 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이승만이 2개월 전에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을 들어서 이에 반대하고 퇴장했다. 

1919년 9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노령임시정부(국민의회)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해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분개해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 임시정부의 노선을 취했다.

1919년 10월에 상해에서 '신대한(新大韓)'지를 발행해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했으며 남형우(南亨祐) 등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해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1920년 4월 '신대한'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이주해 '제이회보합단(第二回普合團)'을 조직하고 내임장(內任長)을 담당했다.

제이회보합단은 독립군단체 '보합단'을 계승한 단체로 무장군사활동을 유일한 독립운동으로 채택한 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9월에는 박용만·신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해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 통일과 독립운동 노선의 무장투쟁 노선에로의 통일을 추구했다.

1923년 1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했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해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해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했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31년 서울에서 간행),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30년 서울에서 간행)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해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 4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관헌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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