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수필가

[충청의창]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수필가

봄이 오면 마음은 산으로, 들로 가 있다. 시골의 논길 밭길 물길을 걷고 싶어지고 동산에 올라 옛 추억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민속사진 전문가 송봉화 작가의 희망학교 특강이 있는 날도 그랬다. 빛바랜 흑백 사진속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 송 작가의 희망학교 특강 주제는 ‘사진으로 보는 우리동네 민속문화’였다. “여러분, 사진 한 장에 가슴 떨린 적 있습니까?”로 시작된 사진의 성찬은 모든 사람을 앙가슴 뛰게 했다. 200여 컷이 넘는 민속 사진에서 저 마다의 애틋함과 간절함이 있었다. 삶의 지혜가 묻어나 있었다. 추억의 서랍을 열어 옛 시간을 더듬었다.

그는 오송에서 태어났다. 국어교육을 전공했기에 학교 선생으로 가야 했지만 존재의 이유를 찾던 중 사진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온 밤을 지새운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벼랑 끝에서, 거센 해풍 속에서, 타인의 무덤에서, 그리고 생과 사를 오가는 삶의 최전선에서 사진기를 들이댔다.

사진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다. 작가의 시선으로 글과 그림으로 담을 수 없는 그 날의 아픔과 영광을 담는 일이다. 잊혀지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영혼을 불어넣고 새로운 희망을 담는 일이다. 그것이 사진작가의 운명이고 철학이다. 한 때는 있는 사실을 기록하기 바쁜 날도 있었지만 심연의 세계에 들어가 보니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들이 찍지 못하는 것까지 찾아냈다.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경작하는 밭에 가매장 했던 시절의 무덤초본도 여럿 챙겼다. 집집마다 풍요를 기원했던 성주와 터주, 농촌문화의 보고(寶庫)인 두레와 농요, 토속신앙인 성황당, 그리고 솟대와 장승, 단오와 백중놀이, 줄다리기와 강강수월래, 바다의 신에게 풍어를 기원하며 띄었던 띠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료로 가득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책을 펴내고 민속문화 기획사업도 펼쳤다. <솟대> <장승과 벅수> <미륵불> <서낭당> <기지시줄다리기> <남사당놀이> <은산별신제> <서해안 배연신굿> 등의 민속출판물을 출간했다. <대청호를 품은 대지와 사람들> <다큐멘터리 사진전>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출판물 제작에도 함께했다. <청주의 기억, 오래된 기록>, <봉산리 옹기가마>, <가학리 두레굿> <월곡리 볏가릿대놀이> 등의 기획작업을 했다. 이 중 <봉산리 옹기가마>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이곳만은 꼭 지키자’를 수상하기도 했다.

40여 년을 이렇게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을 기록하고 담으며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매진해 왔지만 슬픔 가득하다. 우리의 농촌문화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쳐지고 짓밟혔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정신인데 말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애틋한 삶과 희망이 있는데 사람의 마음까지 혼미해졌다. 대동문화가 사라진 지 오래다.

송 작가는 말한다. 사진작가는 현장에 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살아야 하며, 사진 한 장 남기고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 우리 문화원형의 진가를 일본이나 해외에서 먼저 알아보는 슬픈 현실에 눈물이 난다고, 그래도 아침에 눈만 뜨면 사진기를 들고 길을 나선다고…. 지금 장롱속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보자. 사진 한 장에도, 지나간 추억에도 희망이 있을 것이다. 희미한 추억의 문을 두드리자. 마음의 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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