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사월은 조용한 듯 요란하다. 봄꽃들은 이미 만개를 했다.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은근히 소란스럽다. 꽃 잎 한 장 한 장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귀엽지만 수선스럽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들도 한 몫 보탠다. 마치 놀이공원에 처음 온 유치원생처럼 신기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젖히기도 하고 나풀나풀 까불기도 하고 저희들만의 언어로 수다를 떠는 것 같기도. 아니, 그들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그러한가.

봄은 이미, 눈 녹은 물에 장 담그는 일월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눈 녹은 물로 장을 담가야 맛이 있다는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 부터 내려오는 전설 같은 비법으로 얼마 전 까지 필자도 그리했다. 서둘지 않으면 일월에 장 담그기가 수월 하지 않다. 햇살은 따스해지는데 동장군의 미련은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요즘은 주거문화가 아파트이다 보니 그런 풍경을 보기가 어렵다. 허나 시골은 여전히 정월에 장을 담근다. 봄은 그 어머니들의 손끝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춥고 시린 손끝의 노고를 풀어 줄 요량인지 사월이면 봄의 꽃들이 만발한다. 누가 볼세라, 들을 세라 소리 없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느닷없이 제 속을 활짝 드러낸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닫아 두었던 마음의 빗장도 슬그머니 풀어놓는다. 시샘하는 바람소리에 꽃잎들은 이리저리 뒤집히고 젖혀져도 그저 웃는다. 그런 미소로 소리 없는 수선을 떨다가 어느 날 조용히 바람을 따라 간다. 계절 따라 순간, 왔다가는 그들이다.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애련하다.

벌써 내년 봄이 그리워진다. 이 계절이 가면 하얗게 피어나는 오월과 연록색의 유월이 신부처럼 다가온다. 수줍던 새색시는 칠월의 강인한 초록이 되어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다. 비. 바람에 나부끼는 잎들의 수다에 바다도 철썩이고 그 바다로 강렬하게 쏟아지는 태양을 좇아 사람들은 팔월로 달려간다.

오랜 침묵의 바다는 모두의 사연들을 품고 시간의 지우개로 슬픈 발자국도 기쁜 발자국도 외로움도 좌절도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용기의 발자국도 남기면 지워놓고 또 지워내고 그리곤 또 다시 발자국을 남기도록 모래 노트를 곱게 펼쳐주기도 한다. 남기고 지우다보니 사람들은 어느새 버버리 깃을 세우고 또 다른 사랑을 향해, 희망도 품고 좌절도 배우면서 만남과 이별의 오솔길을 걷는다. 그리곤 하얀 눈이 선물처럼 내리면 맑은 유리창에 사랑을 고백한다. 작은 지붕아래 소박한 꿈을 꾸는 청년은 조용한 클래식에 묻히고 군밤을 헤집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밤새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는 시간 속, 흰 눈이 고요히 내리는 겨울 밤! 그들은 달콤한 꿈에 젖어든다. 그렇게 우린 웃다가, 울다가 또한 웃으면서, 울면서 계절 속으로 끝없이 걷고 있다.

조용한 듯 다가오는 계절들이 늘 그렇지만은 않다. 시끌벅적하다. 세상 속, 삶의 모습들도 말! 말! 말들로 참 시끄럽다. 사월에 새끼손가락 닮은 검정 포도를 먹고 있다. 요상하게 생겼다. 제 철이 아니어도 싹 트고 자라 열매를 맺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거늘, 어떻든 ……! 포도 맛은 참 달콤새콤하다.우리의 삶도 늘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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