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어느 해인가 현충일에 TV카메라가 아들의 묘비를 쓰다듬는 노모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 일이 있었다. 팔순이 넘은 그 노모는 눈물을 숨김없이 줄줄 흘리면서 차가운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어미가 죽고 나면 누가 와서 너를 쓰다듬어 줄 것이냐.” 이렇게 울먹이며 흙에 묻혀 흙이 되어 버린 자식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는 그 노모가 효란 무엇인가를 눈으로 보게 한 적이 있었다.

아이의 손등에 상처가 나면 그 아이의 어머니 가슴에 못이 하나 박힌다는 말이 있다. 부모를 둔 자식들은 이를 모르고 제 몸을 함부로 다뤄 부모의 가슴을 치게 만든다. 이것이 곧 불효이다.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이나 값비싼 옷, 혹은 패물을 사드린다고 효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를 살펴서 몸가짐을 조심해야 효는 시작된다.

전선에 나가 전사를 한 탓으로 국군묘지에 묻힌 자식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는 팔순 노파의 가슴에 아무리 나라의 거창한 훈장을 달아줘도 아들의 죽음이 박아준 못을 뽑아 낼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못된 짓거리를 하다가 옥살이를 하게 되거나 길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깡패 짓을 벌인다거나 아니면 몸을 함부로 굴려서 폐인이 되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밤낮으로 가슴을 조이며 마음을 태우고 산다. 이러한 짓을 하는 자식은 불효의 망나니이다.

예부터 손톱하나 머리털 하나도 귀중히 여기라고 하였다. 몸이야 말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무엇보다 몸조심을 하여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라는 말이다. 효라는 것은 부모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 부모가 기뻐할 행동이면 서슴없이 할 것이며 부모가 슬퍼할 행동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 효의 출발이다. 어느 부모가 제 자식 못되기를 바랄 것인가. 아무도 없다. 어느 부모나 자식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니 효를 실천하는 마음은 이 세상을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나쁘면 세상은 어둡고 막막해진다. 이러한 꼴은 못된 인간의 탓으로 빚어지는 인간의 아픔들이다. 이러한 아픔들은 사람이 선해져야 없어지는 병들이다. 효는 이러한 병을 근본부터 고칠 수 있는 약을 인간의 마음으로 조제하게 한다. 그러한 약을 우리는 섬김이라고 한다. 제 부모를 섬길 줄 아는 자는 남의 부모 역시 귀하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면 자연히 세상은 선한 사람들로 메워지게 된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짓거리는 소멸해 갈 것이 아닌가.

공자의 제자 중에 증자는 효행이 지극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증자가 병이 들어 임종이 임박하게 되었음을 알고 제자들을 모이게 하였다. 모든 제자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슬픈 표정을 짓고 주변에 앉았다. 그러나 증자는 이불 밑에 들어있는 자신의 손을 먼저 펴 보이게 하고 손이 온전한가를 보게 하였다. 그런 다음 발을 들어내 펴 보이게 한 다음 발이 온전한가를 보게 하였다. 자신의 손발이 온전한 것을 확인하게 한 다음 증자는 다음처럼 말을 하였다. “깊은 못가에 서 있듯이 얇은 얼음을 밟듯이 몸을 조심하였는데 이제부터는 걱정을 면하게 되었구나.” 이러한 증자의 독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효행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을 손발은 들어 보인 다음 말로 한 것이 아닌가. 내 몸이라고 해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니 함부로 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첫걸음인 것을 증자는 보여주었던 셈이다. 천하의 불효는 부모를 앞서서 흙으로 가는 자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효를 잊어버리고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온 세상이 깡패처럼 딩굴며 무섭게 되고 살벌하다. 효를 낡은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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