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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그들에 빚지다이광표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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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1  1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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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이광표 서원대 교수

지난 6월 22일 전북 정읍 내장산에서 ‘문화재 지킴이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 왜 내장산에서”라며 의아해 했다. 사연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면서 조선왕조실록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는 실록을 4부씩 작성해 경복궁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의 4대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그런데 전쟁의 와중에 춘추관, 충주, 성주 3곳이 불에 타버렸다.

남은 것은 전주사고 뿐이었다. 왜군이 전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전라감사 등은 보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책이 마땅치 않았다. 고민하던 차에 정읍의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힘든 일을 자처했다.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솔들과 함께 우마(牛馬)를 이끌고 전주사고로 달려갔다.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였다. 이들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을 궤짝 64개에 옮겨 우마에 싣고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 그 날이 바로 1592년 6월 22일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안의와 손홍록은 더 깊은 산속의 은봉암, 비래암으로 또다시 실록을 옮겼다. 두 사람과 승려, 관리들은 1593년 7월까지 꼬박 13개월동안 매일 불침번을 서가며 실록을 지켜냈다.

1995년 조선왕조실록 한글본 CD롬이 출시됐다. 색인도 있고 검색도 가능했다. 누구나 쉽게 실록의 내용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일대 사건이었다. CD롬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로 이어졌다. 원하는 주제어를 입력하면 그것에 해당하는 내용이 줄줄이 나온다. 그 어렵던 실록을 누구나 손쉽게 활용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2005년부터 무료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조선시대 배경의 드라마나 영화의 콘텐츠는 대부분 여기서 나온다.

한글본 CD롬 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은 이웅근 전 서울대 교수였다. 그는 한국사 사료의 한글 데이터베이스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조선왕조실록 CD 제작에만 수년간 약 50억 원이 들어갔다. CD롬은 성공했지만 그는 빚더미에 올랐다. 정품 판매량은 수백 개에 불과했고 20만 개의 불법 복제품이 유통됐기 때문이다. 한 차례 부도를 극복했으나 이어지는 부도를 감당하지 못한 채 안타깝게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한 왕조의 역사를 500년에 걸쳐 기록한 것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며 그 분량 역시 가장 방대하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두고 어느 사학자는 “그 꼼꼼한 기록에 몸서리 처질 정도”라고 말한다. 그런 실록이 임진왜란 때 통째로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또한 한글본 CD롬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실록은 전문가들 영역으로 제한되었을 것이고 우리시대 ‘보는 즐거움’도 절반쯤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두 선비와 20세기 교수 출신 사업가의 헌신적인 열정! 꼭 기억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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