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초록이 물들었다. 커다란 들풀다발을 묶어 놓은 듯 한아름이다. 망울이 맺힌 백일홍의 가족이다. 문간방을 얻은 채송화 한포기만이 가느다란 손끝에 주홍별을 쥐고 있다. 인도를 사이에 두고 그루터기와 보도블록 사이에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두 어 송이 애잔하게 꽃을 피웠다.

나무가 고사하고 난 뒤 들꽃이 바람을 타고와 자리를 잡았었다. 한동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멈추게 했었다. 하지만 해 저녁이면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모여들어 뿌연 연기를 숨 막히도록 뿜어냈었다. 불이 꺼지지 않은 꽁초를 던지는가 하면 먹다 남은 음료수 캔이며 아이스크림과 비닐을 거리낌 없이 버렸다. 화분은 쓰레기더미가 되었다.

모종을 얻었다. 마을의 길을 따라 꽃모종을 심는 자원봉사를 하던 이여사가 앞장섰다. 동료들이 힘을 모아 말라죽은 나무의 뿌리를 뽑아내고 산비탈에서 흙을 실어와 돋우었다. 물을 주어 한 이틀 바람 쏘이고 해바라기를 하면 보슬보슬 해진다. 호미를 깊숙이 넣어 공간을 만들어 한손으로 뿌리부터 심는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간격을 두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내 삶처럼 그들에게도 바람이 지나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마른장마에 비를 기다리는 것은 농부만이 아니다. 나무도, 풀도, 곡식도 그리고 이여사가 심어 놓은 백일홍과 코스모스도 온 몸으로 기도 한다. 코스모스는 머리를 풀고 팔다리는 주저앉기 일보직전이다. 백일홍은 자랑하던 커다란 잎사귀를 더 이상 들고 있을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 누구도 감히 담배꽁초를 버리지 못한다. 쓰레기통은 면하였건만 폭염과 가뭄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해가지면 물을 주겠다고 장담하던 사람도 제 목이 타지 않으니 잊어버리기 일쑤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 밤을 버티면 아침이슬 몇 방울에 잎사귀만 촉촉해 질 터 그가 눈길을 주어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알아나 보려나.

새벽이 되어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어지러움에 아예 자리에 누워버릴 지경이다. 그런데 몇 발자국 앞에 그가 뒤뚱거리며 화분 앞으로 다가간다. 한손에는 양동이가 들려있다. 다른 손으로 양동이의 아랫부분을 잡아 물을 천천히 붓는다. 백일홍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다. ‘어푸어푸’ 물 놀이장이라도 온 듯 야단법석이다. 서너 번 오가며 물을 주더니 인도를 가로질러 코스모스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범죄 예방을 위해 CCTV를 단다며 나무를 베어 냈다. 나는 용케도 살아 남은 은행나무 가로수중 하나이다. 백일홍을 옮겨 심듯이 수 십 년 전 이 자리에 심겨졌다. 도로가 흙길 일 때부터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과 자동차가 늘어나며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한없이 추억 속을 걷는다. 적잖이 걸은 것 같은데 그 자리에 서있다. 그가 내 발목을 적신다. 정확히 말해 발 언저리에 심겨진 코스모스에 물을 준다. 마른 흙이 ‘부우’하고 일어서는가 싶더니 주저앉는다. 거리가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땀방울이 흐르는 것 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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