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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 누비며 활동… 한·중 연대 통한 독립운동 앞장서24 연병호 (延秉昊·1894년 11월 22일~1963년 1월 26일)
배명식 기자  |  mooney7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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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1  18: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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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청년외교단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 모집·선전활동
11월 경북 도경찰에 체포·옥고
1921년 세계한인동맹회 설립
충청도의원으로 임시정부 참여
광복 후 2대 국회의원 활동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연병호는 1937년 중국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기까지 20여 년 세월을 국내와 중국대륙, 만주 등지를 무대로 찬연한 자취를 남겼음에도 오랫동안 가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그의 독립운동 행적으로는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나,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의정원, 1930년대 한국혁명당이나 신한독립당 등의 독립운동 정당에서의 활동 정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나마 사실 규명조차 미진한 채, 20여 년간 독립운동의 궤적을 연대기로 작성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중국대륙을 누비며 활동한 때문인지 일제 첩보문서에는 본명 외에도 연병준(延秉俊), 연도명(延圖明), 연병학(延秉學), 연순일(延順一), 연범구(延範九) 등 10여 개의 이명이 등장하고 있다. 

일제가 착오를 일으킨 것도 발견되지만, 활동 무대가 넓어 연병호의 실체를 파악해내기 어려웠던 점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만주 독립군에 참가할 무렵엔 본명보다 주로 연병학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특히 중국 인사들과 교류가 깊어 중국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다. 때문에 그는 한·중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나갔다. 

그런가 하면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를 두고 일제는 '적색운동의 거두'라 지목할 만큼 이념과 사상의 폭이 넓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연병호는 충북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예수교인으로서 1919년에 승려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같은 해 4월에 다시 귀국해 서울에서 이병철(李秉澈)과 협의,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했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국내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단체로서 5월에 조용주(趙鏞周)가 합세해 서울 합동(蛤洞) 170번지 이병철(李秉澈)의 집에서 조직됐다.

그 후 조직을 확장하는 중 안재홍(安在鴻)도 가입해 이병철과 안재홍을 총무로 추대하고 조직을 정비했는데 간사장(幹事長) 김홍식(金鴻植), 외교부장에 김연우(金演祐), 재무부장에 김태규(金泰圭)를, 편집원에 이의경(李儀景), 외교 특파원에 조소앙(趙素昻)을 선임, 결정했는데 그는 조용주(趙鏞周)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돼 활약했다. 

청년외교단의 목표는 임시정부에 대해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해 주는 것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선전활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 등이었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에 재정자금을 전달하면서 △내각 각 부장을 상해(上海)에 집결해 정부의 통일을 도모하고 열국 정부에는 직접 외교원을 특파해 외교사무를 확장할 것 △일본 정부에도 외교원을 파견하며 국가의 독립을 정면으로 요구할 것 △대표를 연맹회의에 파견하여 외교사무를 집행하라는 등의 건의서를 작성해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서울에 체류 중이던 이종욱(李鍾郁)에게 탁송했다.

이에 당시 국무총리였던 안창호(安昌浩)로부터 감사장을 수령했고 총무 이병철(李秉澈)은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이 발급한 경기도 애국금 수합 위원회의 사령서를 수령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의 위촉을 받아 △독립운동 참가 단체 조사표 △독립운동에 즈음한 피해 의사 조사서 △독립운동에 관한 가옥 피해 조사표 △독립운동에 대한 적의 반항행위 조사표 등을 조사 보고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9년 11월에 경상북도 도경찰 제3부는 예수교도가 중심이 된 비밀결사 대한독립 청년외교단과 대한독립 애국부인회가 연계해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울 연건동 이병규(李炳奎)의 집을 수색해 비밀문서 등을 압수했다. 

청년외교단 총무를 비롯한 간부 안재홍(安在鴻), 이병철(李秉澈), 김홍식(金鴻植) 등은 물론 많은 당원들을 체포해 청년외교단의 활동은 끊어지고 관계자들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연병호도 이때 함께 체포돼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安昌浩), 김현구(金鉉九), 조소앙(趙素昻)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해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金容喆), 조완(趙完), 이기룡(李起龍) 등과 함께 동회를 탈퇴했다.

1925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박은식(朴殷植)이 2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5월 31일 북경(北京)에서 이천민(李天民), 박숭병(朴崇秉)과 같이 이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교정서(矯正書)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엄항섭(嚴恒燮),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해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했다. 

1934년 2월에는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洪震), 홍면희(洪冕熹), 김원식(金元植) 등과 회합하고 독립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양 단체를 통합해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했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는데 집행위원이던 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돼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해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했다.

그는 또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해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李甲寧)의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했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이 됐으며 제헌국회(초대)와 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1월 26일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사회장으로 장례 후에 석곡리 선영에 안장됐다. 이후 1976년 10월 국립묘지 이범석묘 옆에 이장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연병호가 체포됐다는 기사.

 

   
연병호 판결문.

 

   
연병호 항일기념관에 세워진 동상. 충북 증평군 도안면 산정길 21(석곡1리 555).

 

   
연병호 생가와 사당. 충북도 기념물 122호. 충북 증평군 도안면 산정길 21(석곡1리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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